이별하거나 병든 여자들의 생
가상의 어느 날 '허궁'의 출산
여자아인 어떤 어른으로 클까
"내 소설이 어미를 잃은 것들의 눈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둠이 땅 아래로 스미는 밤, 돌아갈 불빛을 찾지 못한 이들을 위해 대신 울어 주고 싶다." 소설집 첫머리에 실린 '작가의 말'을 먼저 읽어서일까. 작품집에 수록된 단편들을 하나둘 펼치는 동안 '엄마'라는 이름이 서서히 밀려들었다.
제주 조미경 작가의 소설집 '귀가 없다'는 표제작과 함께 '우리 집에 왜 왔니?', '동거', '한글 공부', '똥돼지', '그녀, 허궁' 등 6편의 단편을 차례로 담고 있다. 그가 2003년 제주작가회의의 '제주작가'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처음 묶어낸 소설집이다.
흑백 사진이 떠오르는 풍경에서 저 먼 미래까지 닿는 이들 소설 속 엄마는 대개 남편의 외도로 결혼 생활이 깨지거나, 병들거나, 심지어 자신의 아이를 학대한다. 환청과 환각('귀가 없다’), 외상성 치매(‘동거’) 진단을 받거나 아들을 낳지 못해(‘한글 공부’) 구박을 받는 식이다. ‘귀가 없다’의 달팽이, ‘동거’의 개미와 바퀴벌레 등은 가족이라는 굴레 등으로 인해 세상을 향해 제때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인물들의 처지를 연상시킨다. 초경을 경험한 열다섯 살 주인공(‘똥돼지’)이 꿈꾸는 어른의 나날은 아이의 바람처럼 그저 평화롭기만 할까.
‘우리 집에 왜 왔니?’엔 오늘날 제주를 살아가는 여자들이 있다. 작가는 단층의 작은 학교와 초록 천연 잔디 운동장, 토토로 숲의 주술에 걸려들어 제주로 향한 서울의 학부모들과 어울리는 서연맘의 시선을 통해 이주 열풍의 이면을 그렸다. "아, 떠날 때가 됐나 봐. 제주다움이 모두 사라져버렸어"라는 인규맘을 두고 서연맘이 "고상하고 우아한 뻔뻔함"이라고 하면서도 "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어미로서의 무능을 세상에 드러낸 것처럼 부끄러웠다"는 대목에선 우리 시대 엄마들을 짓누르고 있는 또 다른 무게를 느끼게 한다.
가상의 어느 날을 상상한 ‘그녀, 허궁’은 인류가 지혜롭게 넘긴 것으로 알았던 두 번째 팬데믹이 남긴 불임이라는 후유증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인류는 제주 신화 본풀이에서 이름을 따온 허궁no.507이라는 한 대의 로봇으로 착상부터 출산, 육아까지 완성하는 핵심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다. 이 과정에 부녀 관계가 부부 관계로 뒤바뀐다는 설정으로 "여자 그리고 엄마의 자리가 중요하다"(양혜영)는 것을 말하며 "여섯 편의 작품을 아우르는 작가의 메시지"를 녹여냈다. 한그루. 1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