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에 사는 제자들 셋이서 1박 2일로 제주를 다녀가고 나자 내 살아 있음과 살아왔음의 한 증거로서 그들의 존재가 새삼 고맙고, 제자들의 '있음'이란 지금까지 내가 모르는 다른 의미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아프리카에 있는 제자들이 떠올랐다.
1990년 후반에 케냐 크라우드스쿨의 교장을 지내다 귀국하던 날, 감잎처럼 두껍고 길쭉한 난디플레임 이파리에 '사랑하는 황'이라고 쓴 눈디올레의 편지가 어딘가 남아 있으며 관사 서재에 아이들이 선물로 가져다 놓은 꽃잎과 구슬 같은 것들이 예뻤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생각해보니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여행이었다. 황무지 언덕에 어린 제자와 앉아 드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열매가 제법 크고 탐스럽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거리가 될 수 없는 소시지나무가 우리가 알 수 없는 용도로 서 있고 에이즈 보균 상태로 태어나 잠시 세상에 있다가 간 어린아이들과 여성할례를 받다가 숨진 소녀들의 들판 묘지가 아스라이 내려다보일 때 그들이 그 짧은 시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임무에 대해서도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나누던 신비로운 저녁이 신기루처럼 눈앞에 떠오른다.
강풍주의보가 내려진 제주에서 커튼을 열고 흐린 창밖을 보자 '아프리카 스콜'이라 부르는 빗방울이 눈앞에 겹쳐진다. 엄청난 흙탕물 격류를 만드는 아프리카 스콜은 아득히 펼쳐진 황무지를 때리는 빗방울 소리와 돌덩어리, 소, 염소 등을 끌고 내려가는 쿵쾅거리는 소리를 내며 번개처럼 왔다 간다. 제주의 건천과 유사한 키동이라 부르는 마른 강들은 그 사이 요란하게 나타났다가 잠시 후엔 깨끗이 사라지고 만다. 드문드문 서 있는 가시나무들이 안개 속에서처럼 지워지며 흔들리다 다시 나타날 때 사막 우중(雨中)은 수락, 스밈, 해체, 동화 같은 현상 속에 아린 삶과 다시 해후할 수 있는 시공간이 되는 것이다.
아프리카 스콜을 함께 맞던 어린 제자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척박한 땅에선 만행(萬行)이 먹고사는 것과 관계하지만 그러나 모든 것이 먹고사는 것을 향한다고 말해 버리면 안 될 것이다. 에이즈병동에서 죽어가면서도 남은 물 한 모금을 옆자리의 환우와 나누던 그들의 가난한 초록 세상은 그저 살아남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나름의 질서를 따라 나누고 섬기는 존재로 사는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보여주곤 했다.
코로나로 병상에 있는 한 제자의 위급한 소식을 전하고 육지로 되돌아간 제자들의 입구는 나의 출구여서 그 입구와 출구는 나에게 가파른 여행의 하나의 안팎이다. 어느 날 나도 떠나면 또 다른 젊은 사람들이 오리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