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제주살이] (28)에구치 히사시

[황학주의 제주살이] (28)에구치 히사시
  • 입력 : 2022. 04.05(화) 00:00
  • 편집부 기자 hl@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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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마을에 가끔 가는 일본식 주점이 있다. 두어 달 바쁜 일이 있어 아예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7~8명쯤 앉을 수가 있는 숨겨진 동네 술집이다. 나는 바지락술찜을, 아내는 와사비를 얹어 먹는 모찌리두부와 오뎅을 주문하고 기다리면 라디오에서 일본 방송이 흘러나온다. 그런 것은 상관없다.

오키나와 생맥주를 마시며 바 테이블 바로 앞에서 음식을 만드는 흰머리 듬성한 일본인 주인과 한국말로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좋다. 열차간처럼 좁고 긴 전면 벽과 오른쪽 벽면엔 선반 가득 사케 병들이 채우고 있다. 숫자를 세어보지 않았지만 200병쯤 되지 않을까. 말하자면 200종류의 사케를 모아놓은 것이고 그걸 7000~8000원 하는 잔술로 팔고 있다.

그러다 깜짝 놀랐다. 바로 내 눈 정면에 소녀의 얼굴이 그려진 사케 병이 놓여 있는 것이다. 대개 일본 사케 레벨은 다양한 필체의 일본어 글씨를 커다랗게 쓰거나 전통의상을 입은 남성을 그려 넣는 게 보통인데, 글자는 전혀 없고 젊은 여자의 얼굴만을 먹선으로 그린 레벨의 사케 병이 거기 있었다. 그리고 왠지 그림이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에구치 히사시의 일러스트였다. 일본인 주인에게 물어보자 바로 인터넷을 찾아 현재 나가노현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그렇구나. 코로나 상황이 아니라면 한번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일고, 아내는 더 신이 나 핸드폰에서 일본 지도를 찾아내 전시장소가 도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는 걸 알아낸다.

에구치 히사시는 1956년 생이니까 나와는 두 살 차이이다. 언젠가 도쿄에서 열린 한일시인대회(韓日詩人大會)에 손님으로 온 그를 만난 적이 있다. 안경을 끼고 벙거지를 뒤집어쓴 그가 반가웠던 건 나와 비슷한 또래라는 것과 나이 들고 유명한 사람의 웃음으로는 꽤 소탈하고 넉넉한 구석이 있었다는 것이다. 흔히 일본의 전설적인 만화가라 불리는 그는 여성을 쿨하고 세련되게,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요즘엔 여성을 뛰어나게 표현하는 작가들이 많지만 당시엔 에구치 히사시의 그림체가 선구적이었고, 무엇보다 패턴에 빠지지 않아 아무나 쉽게 따라 그릴 수 없었다. 그래서 존경을 받았다.

지금은 상업 일러스트레이터로 대단한 인기를 누리며 자신의 이름자를 딴 '코토부키 스튜디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제 그림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젊은 만화가나 일러스트레이터들의 발굴 및 육성에 심혈을 쏟은 '선생'으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청춘을 비추는 한 장의 이야기'에 순정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에구치 히사시가 늙어가는 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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