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롯 웰스 감독의 데뷔작 '애프터썬'은 딸인 소피가 아빠인 캘럼과 20년 전 단 둘이 떠났던 튀르키에 여행을 추억하는 이야기다. 둘만의 기억이 담긴 오래된 캠코더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그해 여름. 거친 입자의 화면 속에 남겨진 추억의 순간들은 윤슬처럼 반짝이다 파도처럼 휘몰아친다. 조각의 기억들은 모래 밑에 있던 해변의 조개껍질이 바다의 내음을 불러오듯 잊고 있던 소피의 감각과 감정들을 소생시킨다.
11살이었던 딸 소피와 31살이었던 아빠 캘럼. 부녀라기보다 남매처럼 보이는 둘은 휴양지에서의 시간을 한가롭게 보낸다. 부모의 이혼 후 아마도 매년 아빠와 단 둘의 시간을 허락받은 것처럼 보이는 소피와 그런 딸을 애지중지하는 청년 캘럼은 누구보다 잘 맞는 친구 같다. 매일 만나는 사이는 아니지만 어색함이 없고 서로의 행동이나 말을 금방 이해한다. 둘은 불편할 것이 전혀 없는 자연스러운 관계다. 특별히 해야 할 일도, 간절히 하고 싶은 일도 없이 흘러가는 휴양지의 시간들 속에서 소피와 켈럼은 서로의 다른 구석들을 조금씩 더 발견한다. 천진한 아이의 들썩임이 줄어든 소피의 성숙함과 소피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어딘가 우울한 모습을 숨길 수 없는 캘럼. 둘은 큰 소리로 싸우지도 않고 여행지를 이탈하지도 않지만 이 관계가 이전과는 같지 않음을, 지금 이 순간이 그대로 다시 돌아올 수 없음을 천천히 알게 된다. 같은 태양 아래, 넓은 바다 위에, 좁고 어두운 방의 한 침대 위에서 소피와 캘럼이 나눴던 시간들이 재생될 때 영화를 보던 관객들 또한 각자의 필름들을 꺼내게 된다. 영화의 파도가 끝나갈 때, 영화가 남긴 잔열을 연료 삼은 관객 각자의 거센 추억 여행이 시작된다. 어떤 관객들은 '애프터썬'을 보고 나서 한참 있다가 갑자기 감정이 격해졌다고 하는데 나 또한 그랬다. 엔딩 크레디트가 다 끝나고 뭔가 휘청거리는 마음으로 극장의 계단을 다 오른 뒤 바깥의 찬 공기가 얼굴에 닿는 순간 울컥하고 덜컹했다. 누군가가 그리워서도, 과거의 내가 미워서도 지금의 우리가 안쓰러워서도 아니었다. 그저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여전히 소중할 시간들을 지금 기억할 수 있어서였다.
살다 보면 소중한 타인을 만나게 된다. 나의 모든 것을 그저 긍정해 주고 나의 치부를 다독여 주는 낯선 사람. 언젠가 우리의 인생에 들어온 타인은 내가 문을 잠그고 웅크려 갇혀 있어도 마침내 그 문을 연다. 닫힌 문을 여는 이, 내가 세워둔 벽의 구멍 안으로 손을 뻗는 이. 이 관계는 기적이다. 드물게도 모두에게 그런 기적은 일어난다. 다만 기적의 순간은 영원할 수는 없다. 그래서 기적의 감각은 몸과 마음의 어딘가에 밀봉처럼 각인된다. 가장 가까운 관계라고 할 수 있을 부모와 자식 또한 타인이다. 특히 어린 시절의 자식과 부모, 나이 든 부모와 자식은 서로에게 온전하게 공집합일 수밖에 없다. 이 친밀한 그리고 간절한 타인들 사이에서 발생한 기적을 서로가 감지하는 일에는 꽤 긴 시간이 필요하다.
'애프터썬'은 부모와 자식으로 만난 타인들이 서로의 심연에 다가서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는 극적인 기승전결 없이 오래된 앨범을 열어보는 것처럼 진행된다. 나의 작은 모습, 아빠의 젊은 순간들을 보며 흐뭇하다가 온전히 채워지지 않은 사진의 자리를 궁금해하다가 결국은 찍지 않은 사진의 순간들을 지금의 마음으로 다시 인화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부모와 자식은 때로는 서로에게 완전히 기대어 있는 사이이지만 한 사람은 아니다. 너는 꼭 내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다며 웃는 엄마를 보면서도 울 수 있는 게 딸이고 나이 든 아빠의 얼굴을 매일 아침 자신의 거울에서 보면서도 낯선 게 아들이다. 그만큼 가깝지만 그래서 멀리 있다. 소피 또한 추억의 조각들을 통해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동시에 보고 과거의 아빠를 지금의 눈으로 따라간다. 캘럼이 간직한 번쩍이는 어둠은 소피가 들어갈 수 없는 문 뒤에 있고 영화는 그 자리에 소피를 데리고 갈 수가 없다. 그것은 거짓이기 때문이다. 다만 어둠 속에서 천천히 돌아오는 눈의 기능처럼 다 꺼낼 수 없던 캘럼의 형체를 더듬을 수 있게 한다.
타인의 심연을 짐작하는 일은 눈을 부릅뜨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다 알지 못했고 알 수 없었던 그리고 다 알아서는 안되었던 시간들을 눈을 감고 찬찬히 끄덕이는 일. 타인의 오랜 상처와 고통과 번뇌를 긍정하는 일. 그 고통을 이해한다고 쉽게 말하지 않는 일. 다만 헐벗은 채 우리의 자리에 잠든 당신에게 이불을 덮어 주는 일. 홀로 떨어진 그에게 큰 소리로 축하를 건네주는 일, 낯선 동작들을 천천히 따라 하는 일 그리고 헤어지는 순간을 깊고 뜨겁게 유예하는 일. 그것이 타인의 심연에 다시 생을 감각할 우리만의 밀서를 보내는 일일 것이다. 언제라도 열어볼 수 있게, 태양처럼 뜨겁고 파도처럼 출렁이는 지금 이 순간의 사랑을 담아.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