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초록을 잇다
  • 입력 : 2024. 09.06(금) 04:30
  • 송문혁 기자 smhg1218@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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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콘크리트 녹색섬'.

[한라일보] 대도시의 사람들은 늘 자연을 갈망한다. 빌딩 숲을 거닐며 바쁘게 일상을 살아가다 누적된 피로를 어렵게 찾아낸 자연을 마주하며 비로소 해소한다. 주말의 캠핑족들은 자연 속에서의 불편을 기꺼이 감수하며 자연이 주는 것들로 스스로를 채운다. 하늘 높이 솟은 아파트 속 사람들은 화분에 담긴 식물들을 가꾸고 즐기며 자연의 일부를 소중하게 누린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초록을 밀어낸 공간 속에서 가장 그리워하는 것이 초록이 주는 안도라니. 초록을 밀어내는 일도 초록을 다시 가져오는 일도 모두 인간이 살기 위한 애씀의 양면이라는 것도.



2024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이성민 감독의 장편 다큐멘터리 '콘크리트 녹색섬'은 사라져가는 도시 속 나무들을 관찰한 기록물인 동시에 누군가의 시절을 충만하게 채웠던 삶의 조각들을, 그 바깥의 일부들을 복원하기 위한 성실한 추적극이다. 1981년 세워진 대규모 아파트 단지인 개포 주공 아파트의 재건축을 앞두고 긴 세월 아파트 이상의 높이로 자라난 나무들이 모조리 베어질 위기에 처한다. 유년 시절을 보냈던 장소와 장소의 기억을 충만하게 채워준 나무들이 흔적이 사라지기 전을 기록하기 위해 이성민 감독은 '개포동 그곳'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그러자 공간과 시간을 공유했던 사람들이 그곳으로 모여든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을 보며 마음의 평화를 얻었던 이도, 나무 그늘 아래에서 누구에게도 받지 못했던 위로를 간직했던 이도, 삶을 둘러싼 자연의 평화를 가까이에서 체감하며 성장했던 이들도 함께 이 작별의 의식에 동참한다. 사라져가는 것들 속에서 오히려 또렷해지는 감각은 '콘크리트 녹색섬'의 중요한 동선이 된다. 누구도 허물 수 없는 각자가 가진 기억의 힘은 남아있는 나무들의 생존을 위한 모두의 용기가 되고 콘크리트 안에 있던 녹색섬, 살아가야 할 나무들을 위한 응원이 된다.



'콘크리트 녹색섬'은 수많은 사람들의 인터뷰로 이루어진 영화다. 많은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간에 대한 추억은 시간이 오래 지났지만 신기하게도 나무의 초록만큼이나 선명하다. 시절을 버티게 해주었던 든든한 언덕이 꼭 곁에 있던 가족과 친구에게만 있지 않았음을 영화는 그렇게 상기시켜 준다. 누군가는 어른이 되어서, 천천히 나이 들어 가면서 자연의 힘과 위안을 더 느끼게 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우리 안에 자연이 녹아 들었던 시절은 나이와는 상관이 없음을 알게 된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나무에게, 누구와도 나누지 못했던 시간을 함께했던 나무에게 느끼는 감정들을 영화는 인터뷰 사이 사이의 틈마다 빼곡하게 채워 넣는다.



'콘크리트 녹색섬'을 보면서 비명을 지른 순간들이 있다. 거대하게 자라난, 아니 여전히 자라고 있는 나무들이 베어져 땅으로 추락하는 순간들을 목도하면서 였다. 나는 정말로 극장에서 입을 틀어막는 경험을 했는데 영화는 이 절단의 순간들을 미동없이 바라본다. 아마도 그때 카메라에 담긴 것은 기록의 의지인 동시에 절단 이후를 향해가는 마음의 다짐이 아니었을까. 영화는 그렇게 무용함이라 부르는 것들에 저항하면서 나아간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어쩔 수 없는 일, 시대의 변화에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라고 체념하는 순간들에 힘차게 고개를 저으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콘크리트 녹색섬'은 소중함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영화다. 무언가를 아끼고 지키는 일에 필요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찾아가는 영화다. 수많은 나무들이 사라졌고 나무가 사라진 곳에 세워진 공간에서 또 다른 이들은 각자의 삶을 이어갈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의 지난한 여정 덕택에 사라진 나무들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또한 나무와의 기억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사랑했던 곳들마다 모두 폐허가 되었다는 자조 위에 세워진 영화 '콘크리트 녹색섬'은 이렇게 곡진한 쌍방의 러브레터다. 선명한 초록으로 이어진.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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