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전쟁 같은 사랑, 전쟁 같은 하루, 폭격 맞은 것 같은 집 구석, 목숨을 건 도전, 총 맞은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보였고 읽었던 관용구들이었다. 마주치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 또한 일상에서 종종 마주치는 알 것 같은 기분이고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입이 다물어지고 고개가 멈춰졌다. 진짜 전쟁을 겪은 적 없는 나에게 눈 앞에 펼쳐지는 실제의 전쟁은 순간 거짓말 같다고 느껴졌고 이내 이 가벼운 부정이 얼마나 무거운 외면일지를 깨닫자 마음에 와 닿는 공포에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므스티슬라우 체르노우 감독의 ‘마리우폴에서의 20일’이 국내 극장의 스크린에서 상영 중이다. 어떤 영화는 온 힘을 다해 관객에게 가 닿으려는 시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작품이 그렇다. 이 간절함은 오로지 관객의 관람을 통해서만 응답이 가능하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침공으로 포위된 우크라이나의 항구 도시 마리우폴의 20일이 AP 취재팀의 카메라로 낱낱이 기록된다. 흐린 하늘 아래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이 있다. 전쟁이 날 것 같다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행인에게 취재팀은 말한다. 집으로 돌아가서 안전하게 피해 있으라고. 긴박한 상황 속에서 염려를 담은 그 말은 순식간 거짓말이 되어 버린다. 마리우폴에는 이제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각자와 함께의 일상을 보내던 도시가 불과 며칠만에 지옥이 되어 버린다. 크고 작은 모든 소리들은 비극의 전조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고 모든 불빛들은 폭격의 신호탄과 폭격 후의 상흔으로 도시를 뒤덮는다. 지하실과 병원에 숨어든 남은 사람들은 불안에 떨다가 오열하고 품에 안긴 아이와 동물들을 감싸 안는다. 모두의 몸과 마음이 덜덜 떨린다. 이 모든 일이 카메라에 기록된다. 이 기록의 목적은 집요하고 단순하다. 세상에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것, 총 대신 카메라를 손에 든 기자의 사명감인 동시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생존자의 동일한 외침이다 절규에 가까운.
‘마리우폴에서의 20일’은 불과 1분이 채 안되는 가짜 뉴스 앞에서 빠르게 불 붙고 식는 이들의 감정 앞에 카메라의 언어로 꾹꾹 눌러 담은 90여분의 호소문이다. 요약할 수도 없고 속독할 수 없는 참상의 필사인 이 영화는 보는 이들이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게 그렇게 만들어졌다. 영화 속에는 나오는 이 말은 영화를 본 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전쟁은 마치 엑스레이와 같이 인간의 내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좋은 사람은 더 좋게 변하고 나쁜 사람은 더 나쁘게 변한다.'
‘마리우폴에서의 20일’에는 폭격 속에서도 병원을 지키며 빠르게 늘어나는 부상자와 환자들을 돌보는 의사들이 모습이 있는가 하면 망가진 도시의 부서진 상점에서 아무렇지 않게 도난을 일삼는 이들의 모습이 함께 있다. 카메라의 뒤에서 위험을 감수하며 진실을 기록하는 이들이 동시에 보는 건 이 모든 순간들을, 피를 흘리고 실려가는 부상자들을 '가짜 뉴스의 연기자'로 탈바꿈 시키는 '잔짜 가짜 뉴스'의 끔찍함이다.
참사와 비극은 먼 타국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조금도 낯선 말이 아니다. 과거 수많은 전쟁을 겪었고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가 불과 최근 10년 안에 일어난 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기 떼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잊음으로 차츰 잃어간다. 어떤 감각이 마비될 정도의 슬픔이 할퀴고 간 자리에 남은 상처를 보는 일은 당연히 두려울 수 밖에 없고 애도에 담기는 소리가 울음의 진동인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게 무감을 택하는 때가 있다. 외면하려는 마음은 그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고통은 생각보다 더 자주, 기도를 배반할 만큼의 파도로 삶을 덮쳐온다. 당장 내 눈 앞의 파도가 아니더라도 내 몸을 적실 만큼의 실감이 아니더라도 나와 닮은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을 울부짖게 하고 기어코 그 삶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것은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보이고 들리는 진실이다.
‘마리우폴에서의 20일’은 우리에게 묻는다. 고통을 목도한 다음에 대해, 지옥이 실재하는 동시대의 삶에 대해 우리는 우리가 될 수 있는지를. 당장은 어떤 말로도 만족할 만한 답을 꺼내 놓을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이지만 나는 영화가 간절하게 전해야만 했던 기록들을 삼키지 않고 내 몸 안에 둔다. 이 작고 확실한 고통을 느끼는 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으면서. 우리의 고통, 그 다음에 대한 나의 답을 찾아가면서.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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