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실의 하루를 시작하며] 망종 유감

[이종실의 하루를 시작하며] 망종 유감
  • 입력 : 2024. 06.05(수) 00:00
  • 송문혁 기자 smhg1218@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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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오늘은 이십사절기의 하나인 '망종(芒種)'이다. 망종은 '곡식의 종자를 뿌리기에 적당한 시기'라는 뜻이나, 실제로는 보리 베기와 모내기가 이뤄지는 날로 쓰이고 있다. 요즘에는 이런 작업이, 기후 환경의 변화와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해 열흘 정도 앞당겨지고 있다. 망종은 보통 6월 6일 전후로 현충일과 잘 겹친다. 농촌에 살면서 고등학생 때까지, 현충일이 가까워지면 충혼께 드리는 감사보다 보리 거두기에 일손을 보탤 걱정을 먼저 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이날이 보리가 익어서 우리에게 오고 벼가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는 점에 그 의미를 두고 싶다.

보리 수확은 몸과 마음을 고되게 했지만, 행복도 주었다. 기온은 한여름 뙤약볕 아래의 열기보다 더 덥게 느껴졌다. 보리의 까끄라기가 옷 속을 파고들고 땀에 전 몸에 달라붙어 괴롭혔다. 물이 귀한 때라 잘 씻지 못하고 잘 때가 많았다. 보리를 제때 베고 묶고 모아놓기만 했다고 잘한 게 아니었다. 탈곡기와 때를 맞추어야 했는데, 그게 그리 쉽지 않았다. 그 기계가 동네마다 있는 게 아니어서 하루나 이틀 대기하는 일이 흔했다. 그동안 비를 피하려면 보릿단들을 쌓고 가리개로 덮어야 했다. 힘들어도 보릿고개 시절이라, 햇보리로 지은 밥을 맛볼 수 있어서 행복했었다.

우리의 보통 삶은 소소한 일상부터 특별한 과업에 이르기까지 씨뿌리기와 거두기로 이뤄지고 있다. 파종할 때 필요한 공력을 들이며 희망을 품고, 수확하면서 들인 수고만큼의 보람을 얻으며 행복해한다. 무심한 듯 보내고 맞이하는 하루가 그렇고, 한 달, 한 해가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 세상은 우리가 알든 모르든 이와 관계없이 호응하며 돌아간다. 망종이 말해주듯, 보리는 겨울 추위와 봄의 온기로부터 힘을 얻으며 영글어 가고, 벼는 여름의 열기와 비바람에서 에너지를 받으며 결실을 준비하고 있겠다. 범인(凡人)들은 큰 욕심 없이 본분을 지키며 세상의 순리에 따라 살고 있다.

요즘 나라 안 어느 세계에선 이런 '순리', '보람'과 '희망'을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변화의 계기는 있었으나 그 후 나아진 게 별로 없다. 머릿속에 다른 '망종'이 떠오른다. '몹쓸 녀석'이라고 꾸짖는 말은 '망할 종자(亡種)'라고 한자는 설명하고 있다. 공식어는 아니지만 '자기의 근본과 본분을 잊음(忘種)'도 좋은 것은 아니다. 그 세계를 보면 이를 연상시키는 자들이 꽤 눈에 띈다. 저들은 태생적으로 무감각하거나 몰염치한 것 같다. 그러니 반응도 행태만큼이나 뻔뻔스러운 거다. 혼탁한 물이, 주변과 아래의 물이 흐리다고 생야단하고 있다. 세상은 마취된 듯 제어력을 잃은 지 오래다. 이해타산에 따라 몰리고 편을 가르면서 제멋대로 분간하는, 망종들의 작태가 나라를 망치고 있는 것만 같다. '쌀'은 보이지 않고 '까끄라기'만 몸에 단단히 달라붙은 듯하다. 하필 절기보다 '세상 그르치는 사람'이 더 생각나는 날이다. <이종실 오라동자연문화유산보전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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