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정묵의 하루를 시작하며] 다 그럴 만하다는 것

[좌정묵의 하루를 시작하며] 다 그럴 만하다는 것
  • 입력 : 2024. 06.12(수) 00:00
  • 송문혁 기자 smhg1218@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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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유월이 지나는 때가 되면, 제주를 떠나 캐나다 앨버타로 가서 두어 달쯤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곤 한다. 시야 너머까지 이어지는 초록의 들과 산 그림자를 몽땅 담아낼 수 있는 맑은 호수, 그리고 우리나라 산과 산 사이의 계곡과는 달리 평지 밑으로 물길을 내며 풍경을 지어내는 밸리(valley)는 그 신비함만으로도 경외감을 느낄 만하다. 꼭 유월이면 그곳으로 가고 싶은 이유가 이뿐만이 아니다. 제주의 유월은 몹시도 습하고 눅눅하다. 팔월의 여름보다 더한 더위에 시달리며 눌어붙는 느낌으로는 삶의 활력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이때쯤이면 바닷가 마을의 꼬맹이들은 벌써 포구 안에서 물놀이로 여름을 맞이하게 된다. 들판으로는 보릿짚이나 까끄라기를 태우는 불과 연기가 솟아올라 뜨거운 여름 하늘을 끌어내린다. 그리고 왜 그리 비는 잦아서 보리 낱알을 볕에 말리는 일로 분주했었는지. 지금은 이런 풍경이며 삶의 모습도 모두 사라졌다. 제주의 여름철 들판 풍경은 다른 작물 농사로 대체되었다. 계절의 변화에 상응하는 삶의 풍경들이 제주뿐만이 아니라 모든 지구촌이 도시화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제주가 가지는 자연의 힘은 무엇보다 왕성한 생명력이다. 모든 식물은 물론이고 작은 벌레들까지도 이 계절에는 왕성한 삶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한라산 가까이 숲을 찾아가게 되면 작은 풀꽃이며 커다란 섬개벚나무들, 이슬까지도 매달려 있는 정교한 그물 집에서 요람을 타는 늠름한 호랑거미도 만날 수 있다. 이 계절에 마땅히 사람으로, 제주인으로 저들처럼 왕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헤아릴 수도 없는 종 중에서 겨우 50억 개체에 불과한 한 종일 뿐이다. 지구별 안에서 저들과 함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제주의 유월 장마는, 오랫동안 터전을 일구면서 살아온 제주인들에게도 이때의 바람과 비 그리고 높은 습도는, 시련임에는 틀림이 없다. 제주를 찾아 한 달 살기가 유행이었을 때에도 외지인들로부터 기후에 적응하기가 힘들다고 하거나 심지어 평소에 없던 풍토병까지 얻게 되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런 일들은 제주만이 아니라 어떤 곳일지라도 생길 수 있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문화적 삶의 조건 이전에 우선은 자연과의 관계가 적지 않은 삶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캐나다 앨버타의 유월 한 달을 지나고 곧 서늘한 가을을 맞고 겨울을 준비하려면 계절에 민감해야 한다. 여행이면 몰라도 삶의 터전으로 삼는다면 더욱 그렇다. 물론 제주의 유월을 살아내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제주인의 후손으로서 이미 자연을 받아들이며 충분히 대응할 만한 인자를 가지고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몹시 습하고 더운 유월은 짜증을 내게 되지만 제주의 계절은 우리에게 또 이겨나갈 수 있을 만큼의 힘을 주게 된다는 걸 비로소 알아가고 있다. 세상 모든 일들이 그렇지만 제주의 삶이 또 다 그럴 만하다. <좌정묵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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