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윤한봉(1948-2007)은 1970년대에 민청학련 사건 등의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1980년 5월 광주지역 학생운동 주모자에 대한 예비검속(豫備檢束)을 피해 수배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예비검속. 혐의자를 미리 잡아 놓는 일이다. 이승만 정권 시절 수많은 사람들이 예비검속을 당해 속절없이 목숨을 잃었다. 전두환 신군부 시절 또한 같은 상황이었으니 윤한봉은 5·18 광주항쟁을 수배자 신분으로 보내고, 이듬해인 1981년 4월 화물선 레오파드호에 숨어들어 미국으로 밀항했다.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 그것은 윤한봉에게 평생의 굴레로 남아 그 자신의 목숨을 옥죄는 밧줄 같은 것이었다. 미국에 정착한 그는 '민족학교'와 '재미한국청년연합(한청련)' 등의 단체를 만들어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이어갔다. 1993년 마지막 5·18 수배자 신분에서 풀려나 조국으로 귀국한 이후에도 '5·18기념재단 '설립에 앞장섰으며, '민족미래연구소장'과 '들불야학기념사업회장' 등을 맡으며 사회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본인을 위한 개인적인 보상을 받지 않으며 멸사봉공의 자세로 살다가 2007년 지병으로 타계했다.
고인의 사후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 추모제를 이어왔다. 올해도 지난 6월 23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윤한봉선생 17주기 추모문화제'가 열렸다. 시와 노래와 연극과 영상과 판화가 함께 했다. 주홍의 샌드애니매이션과 김경자 감독의 다큐영화는 고인의 삶을 감동적인 서사와 감성으로 승화했다. 윤한봉을 따르는 후배들의 합창과 노래패 '세세세'의 공연에 이어, 무용극단 '태'의 협업으로 이뤄진 극단 '토박이'의 공연은 박정운 감독이 쓴 시나리오로 윤한봉의 일대기를 그린 단막극이었다. 임홍수의 판화 작품은 회원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놀라운 것은 이번 추모제를 끝으로 기념사업회가 해산한다는 것이다. 까닭을 듣고 보니 고인의 뜻이었다. 기념사업회 같은 거 하지 말라 했던 고인의 뜻을 어기고 당분간만 추모사업을 하고자 시작했던 일이 너무 길게 이어졌다는 것. 아쉬움이 큰데도 이렇게 딱 잘라 해산한다는 것은 그만큼 고인의 뜻을 지엄하게 모신다는 것이다. 호남 토박이말로 똥거름을 의미하는 '합수(合水)'라는 호를 지어 한없이 낮은 곳에 임한 윤한봉의 후예들답다.
이 세상에 이렇듯 아름답게 깃발을 내리는 일도 있다니! 더욱 멋진 일은 사업회의 역사와 재정 등 모든 것을 '들불야학기념사업회'로 넘겨서 그 정신을 이어간다는 점이다. 윤한봉의 모든 것을 생전 고인이 만든 단체로 귀속하는 것이다. 전남대에 '합수 정원'이 생기고, 국경선평화학교에 '합수의 방'을 만드는 등 그를 기리는 공간이 넓어지기에 서운함을 덜 수 있다. 생전처럼 작고 이후에도 이렇게 멸사봉공하는 '윤한봉의 큰 뜻'에 다시 한번 머리를 숙인다. <김준기 광주시립미술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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