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오름 혹은 시오름이란 샘이 있는 오름
[한라일보] 한라산 영실탐방로를 따라 오르다 구상나무숲을 벗어나면 고산초원이 펼쳐진다. 여기서부터 왼쪽 오름을 따라 잘 만들어진 나무 데크 위를 걷는다. 이 오름은 봉우리가 하나인가 둘인가. 두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는 부분이 조금 낮아 보일 뿐 뚜렷하게 구분이 되는 정도는 아니다. 첫 번째 마주하는 봉우리를 윗세족은오름이라고 한다. 정상 전망대에서 보이는 경관이 그야말로 천하 절경이다. 오른쪽으로 멀리 윗방애오름, 방애오름, 알방애오름이 보인다. 왼쪽으로는 장구목오름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곳에 설치한 설명판에는 이 오름들과 더불어 가장 높게 보이는 한라산 정상이 있는 오름을 '화구벽(백록담)'이라고 표기했다. 설마 고대인들이 주변의 오름들은 다 고유한 이름을 붙였는데, 정작 가장 높은 오름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아니면 진짜 화구벽이라고 했다고 보는 건가요? 이 오름이 바로 두무오름이다. 가장 높은 오름이라는 뜻이다. 본 기획 2부를 참고하실 수 있다.
누운오름이라고도 부르는 세오름은 샘이 있는 오름이라는 뜻이다. 김찬수
이 윗세족은오름에서 한라산 정상 방향으로 보이는 봉우리가 윗세누운오름으로 부르는 오름이다. 이처럼 윗세족은오름과 윗세누운오름은 언제부턴가 이렇게 구분해 두 개의 오름으로 부르고 있다. 언제, 누가 이렇게 구분했단 말인가? 앞 회에서 오늘날 윗세오름은 세성제오름에 대비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지명해설은 근거 없는 이야기라는 점을 제시했다. 전망대를 포함해서 정상 쪽 방향으로 보이는 봉우리도 원래 세오름이었다. 지금도 이 주변을 세오름밧 혹은 시오름밭이라고 부르는 점으로 볼 때 원래 이름은 세오름 혹은 시오름임을 알 수 있다. 샘이 있는 오름이라는 뜻이다.
누운오름은 늘어진 오름, 붉은오름은 불른 오름
윗세족은오름이라는 말은 세성제오름과 세오름의 '세'에서 '삼(三)'을 연상해 지어낸 얘기다. 세오름이 세 개의 오름이라면 윗세족은오름도 별개의 오름이라야 논리에 맞는다고 생각한 나머지 이렇게 이름 지을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왜 이 오름을 세오름 혹은 시오름이라는 이름 외에 '누운오름'이라 했는가. '누운오름'이라는 지명은 '서 있는'의 대비지명으로 '누운'이라고 했을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실은 '늘어진'의 뜻이다. 즉 '누운'이 아니라 '는'이다. '누운'이란 '선'에 대응하는 지명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서다'의 대비는 '앉다'를 쓰지 '눕다'를 쓰지 않는다. 그리고 이 주변에 '선'이라 할 만한 오름은 없다. 윗세족은오름과 윗세누운오름을 하나의 오름으로 본 것이다. 그러면 길게 늘어진 오름이 된다. 퉁구스어로 '느르'는 '긴' 혹은 '산맥'이란 뜻이다. 우리말 '늘다', '늘이다'의 어간 '늘'과 어원을 공유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 일대는 3개의 오름이 있는 것이 아니다. 누운오름과 붉은오름 2개가 있는 셈이다. 아니면 달리 세오름과 윗세오름 2개가 있는 셈이 된다. 누운오름은 늘어진 오름 혹은 '는오름'이다. 긴 오름이라는 뜻이다.
노루샘의 '노루'는 '얕은 물' 혹은 '젖은 곳'이라는 북방어 '노르'에서 기원한다.
누운오름과 붉은오름은 오름의 형태에서 기원한 이름이다. 붉은오름이란 여러 문헌에 붉은 색깔을 띠어서 이렇다고 한다. 그런 것이 아니다. 알타이어의 공통어원으로 '보로-'가 있다. 산이나 언덕을 의미한다. 그중 퉁구스어에는 '비루-칸'이 산을 지시하고, 만주어로 '보란', 솔롱어로 '비라칸'에 대응한다. 제주도의 고대인들은 불룩한 모양의 이 오름을 '보란오름' 혹은 '비라칸' 등으로 불렀던 것 같다. 이 발음은 '(배가) 불다'에서 느낄 수 있는 불룩한 모양을 연상하게 되고, 점차 '불른오름', '부른오름' 등으로 불렀던 것 같다. 이걸 알아들을 수 없었던 기록자들이 '붉은오름' 혹은 '적악(赤岳)'으로 표기하면서 지금의 붉은오름으로 고착된 것이다. 이곳 누운오름(늘어진오름)에 비해 불룩하게 생겼으니 '불른오름', 이게 점차 붉은오름이라 한 것이다. 제주도 전체적으로 붉은오름으로 표기하는 오름들은 거의 모두 인근에 낮거나 납작하거나 늘어진 오름 가까이에 있다.
노루샘의 ‘노루’, 짐승 노루와 무관, 성널오름의 ‘널’과 공통기원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노루샘이라는 샘은 바로 이 세오름에서 솟는 샘이다. 노루가 자주 이용하는 샘이라서 이렇게 부른다고 흔히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노루'라는 음상에서 짐승 노루가 연상되어서다. 노루샘이라는 샘 이름은 노루와 관련이 없다. 이 '노루'라는 말은 제주도 고대인의 유산이다. 퉁구스어권과 몽골어권의 여러 언어에서 '노르'가 '얕은 물' 혹은 '젖은 곳'이라는 뜻으로 널리 쓰인다. 제주도 전역에서 '노리물', '노린-', 축약형 '논-' 등이 붙은 지명이 많다. 심지어 '노루 獐(장)' 혹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음이 같은 '장수 將(장)'까지로 분화한 경우도 있다. 장수물이라는 지명은 이런 경우다. 성널오름의 '성'은 샘에서 기원한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널'은 바로 이 '노르'에 온 것이다. 성널오름은 샘과 얕은 물이 있는 오름이다.
한편, 본 기획 2부에서 다루었듯이 백록담의 '록', 물장오리의 '장'도 '노르'에서 기원했다. 호수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경우는 퉁구스어로 'noor'라 발음한다. 현대 몽골어에서는 'nuur'라 한다. 이곳 노루샘처럼 '얕은 물'을 지시하는 경우 퉁구스어에서 'ńür-', 몽골어에서 'nor-'로 짧게 발음한다는 데 차이가 있다.
세오름은 샘이 있는 오름, 누운오름은 늘어진 오름이다. 윗세오름은 세오름 위의 또 다른 세오름이다. 붉은오름은 불른(부른) 오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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