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96] 3부 오름-(55)드넓은 습지 '숨은물벵듸'를 품은 노로오름

[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96] 3부 오름-(55)드넓은 습지 '숨은물벵듸'를 품은 노로오름
노로오름의 ‘노로’, 성널오름의 ‘널’과 같은 말
  • 입력 : 2024. 08.27(화) 05:00
  • 송문혁 기자 smhg1218@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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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가 많이 살지도 닮지도 않아

[한라일보] 노로오름이라는 이름을 가진 오름이 있다.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 산139번지이다. 족은노로오름도 있다. 애월읍 고성리 145번지에 해당한다. 이 두 오름은 주소는 다르지만 바싹 붙어 있다. 두 오름은 그래서 하나의 오름으로 보인다. 북동쪽에서 남서 방향으로 약 1.3㎞ 정도로 긴 형태를 한다. 이 두 오름은 별개의 분화구를 가진 오름이다.

주소지가 애월읍 유수암리와 고성리로 돼 있어서 마을과 관련이 있나 하고 생각하기 쉽다. 이 오름은 천백도로휴게소에 북서쪽으로 직선거리 약 2.3㎞ 지경에 있다. 깊은 산속이다. 노로오름은 표고 1070m, 자체 높이 105m, 저경 884m다. 족은노로오름은 표고 1019.2m, 자체높이 34m, 저경 412m다. 노로오름은 원형의 분화구 1개와 원추형 화구 5개로 이루어져 있다. 족은노로오름은 원추형 분화구 1개와 원추형 화구 1개로 되어있다. 두 오름의 정상 간 거리는 약 600m다.

노로오름의 지명 기원이 된 숨은물벵듸, 둘레 약 2.5㎞로 국내 최대 산지습지다. 김찬수

이 지명 노로오름에 대해서는 '노로'가 제주어로 노루를 가리키므로 노루와 관계있을 것이란 믿음이 굳건하다. 제주어로 노루를 '노리'라고 하지만 '노로'라고도 하는 건 맞다. 이 노루와 노로오름은 어떤 관계가 있길래 오름 이름에 '노루'가 들어갔단 말인가? 이에 대해 예전에 노루가 많이 서식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명한다. 그런가 하면 이 오름의 형상이 노루와 같다고 해서 붙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이처럼 설이 갈리는 것은 어느 하나 제대로 수긍이 가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다. 어느 방향으로 봐도 노루와 닮았다는 구석은 찾아볼 수 없다.



뜻을 모르니 억지로 노루와 연관시키려 해

1530년 간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장악(獐岳)이라 기록했다. '주 동남쪽 55리에 있는데 둘레가 43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외로도 노로악(老路岳)이라고도 쓴다. 그러므로 과거 한자 표기는 장악(獐岳)과 노로악(老路岳) 두 가지가 있는 셈이다. 여기 장악(獐岳)을 어떻게 볼 것인가? 과연 여기에 쓰인 대로 한자의 뜻을 살려 짐승 노루(獐)라는 취지로 썼을까?

숨은물벵듸에서 바라본 노로오름의 일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저자는 노로오름이라는 이 오름의 지명이 짐승 노루에서 왔다고 생각한 걸까? 문제는 그렇다고도 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단정적으로 말하기 곤란하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짐승 노루를 지시하기 위해 한자 장(獐)을 빌려 쓴 것이라면 훈독자 차자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훈가자 차자 방식도 있다. 노로오름의 '노로'가 무얼 지시하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이 지명을 '노로'오름이라고 한다는 것만 나타낸다는 취지라면 훈가자 방식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훈가자란 '노로 장(獐)'의 뜻 부분 '노로'로 읽으라는 취지다.

과연 노로오름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노로오름엔 지명에 반영될 만큼 노루가 많이 서식했을까? 아니면 이 오름의 형태가 노루를 닮았나? 노루가 많이 살았다면 지금엔 왜 다른 곳에 비해서 특별히 노루가 많이 살지 않게 되었을까? 이 오름 모양의 어떤 점이 노루와 닮았다는 것인가. 노로오름에서 지명을 제외한다면 노루와 연관 지을 만한 어떤 특징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오름 자체는 노루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점을 알게 되는 것이다.



숨은물벵듸의 '숨은', 송아오름의 '송-'과 같은 기원

이 오름의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드넓은 습지 '숨은물벵듸'가 있다는 점이다. 숨은물벵듸란 이 오름의 동쪽 해발 980m에 형성된 습지를 말한다. 이 습지는 바로 이 노로오름(1070m), 세성제셋오름(1114m), 살핀오름(1076.3m)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다. 면적은 약 4만3602㎡, 약 1만3000평 정도다. 노로오름에는 이 습지 외에도 크고 작은 습지들이 몇 개 더 있다. 숨은물벵듸는 둘레가 약 2474m에 달하는 산지 습지로는 국내 최대다. 주변의 오름과 연계된 다양한 생태계를 포함하고, 보기 드문 평탄지 개방형 습지로서 독특한 인상을 주고 있다.

제주도의 고대인들은 오름의 모양이나 노루가 여기에 많이 산다는 취지로 노로오름이라고 이름을 붙인 게 아니다. 바로 이런 습지를 가진 오름이라는 뜻에서 붙인 것이다. 이런 해석은 본 기획 성널오름 편과 노루샘 편에서 다룬 바 있다. '성널'의 '널'은 바로 이 '노로'와 같은 기원이다. '노루샘'은 세오름에서 솟는 샘 이름이다. 이 경우도 짐승 노루와는 관계가 없었다. 퉁구스어권과 몽골어권의 여러 언어에서 '노르'란 '얕은 물' 혹은 '젖은 곳'이라는 뜻으로 널리 쓰인다. 여기서 다양하게 변화하고 분화했다. 노로오름의 '노로'란 이런 어원에서 기원한 것이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숨은물벵듸란 지명도 짚고 넘어가자. 흔히 숨은물벵듸는 '오름 사이에 숨은 물 들판'이라는 뜻이라고 알려졌다. '벵듸'란 넓은 제주어다. 그러나 이건 오늘날의 관념으로 한 해석일 뿐이다. 여기서 '숨은'이란 우리 국어서 말하는 '숨다'에서 온 말이 아니다. 제주어에 이런 말은 없다. 제주어로 '숨다'란 '곱다'라고 한다. 숨은물벵듸의 '숨은'이란 바로 송아오름에서 보았듯이 '송-'에서 온 말이다. 북방기원이다. '송아' 혹은 '송은'에서 변한 말이다. '물이 솟아 만들어진 습지나 물웅덩이 혹은 못'이란 뜻이다. 숨은물벵듸란 드넓은 습지 혹은 물웅덩이란 뜻이다. 노로오름은 넓은 물이 있는 오름이란 뜻이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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