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농업유산 제주의 화전(火田)Ⅱ] (2)떠난 사람들, 남겨진 흔적들-⑥ 수망리 중잣성과 화전

[잊혀진 농업유산 제주의 화전(火田)Ⅱ] (2)떠난 사람들, 남겨진 흔적들-⑥ 수망리 중잣성과 화전
조선시대 산마장 터 화전민들 생업 공간으로 변모
  • 입력 : 2024. 11.07(목) 03:00
  •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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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 민오름 북쪽. 중산간 지대인 이곳 평원지대는 돌담이 1m 안팎 높이로 수백m 길게 연결돼 있다. 바로 조선시대 국영목장을 관리하기 위해 쌓은 중잣성이다. 중잣성은 목장지대뿐만 아니라 숲속까지도 이어진다.

수망리 민오름 북쪽 목장지대. 가운데 길게 이어진 돌담이 중잣성이다. 화전민 터는 사진 오른쪽 위 숲지대에 있다.  특별취재팀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숲속에는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이곳 중잣성 넘어 숲지대에 화전 마을 흔적이 남아있다. 이 일대는 최근까지만 해도 한라산둘레길 목장길로 이용됐다. 목장길에서 숲으로 1백여m 정도 들어가자 석축구조물들이 나타난다. 길게 연결된 올레, 통시 등으로 이용했던 흔적들도 보인다. 허물어진 집터 주변에는 넓은 면적에 걸쳐 대나무가 들어찼다. 사람들이 출입이 힘들 정도로 빽빽하다. 그 주변으로 석축이 길게 연결되고, 일정 정도 크기로 구획돼 있다.



인공연못·집터·경작지 등 분포


화전 마을 터에서 동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엔 인공 연못도 남아 있다. 연못은 약간 경사진 지면을 이용해서 일부 땅을 파내고 둥글게 담을 쌓아 조성했다. 직경이 거의 6m 정도로 이곳 화전민들이 생활용수 등으로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수망리 민오름 주변 1967년도 항공 사진.(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붉은 원 일대 화전민 집터가 뚜렷하다. 그 아래 검은 띠처럼 보이는 것이 중잣성이다. 특별취재팀

1967년도 항공사진을 보면 이곳 화전 마을터는 수망리 1033-2,3,4번지에 해당한다. 3가구가 살았었다. 또 이곳 집터 위쪽 지점인 수망리 1033, 1033-1, 1034, 1035번지도 4가구의 화전민 집터가 자리했다. 중잣성은 지금과 비교하면 더욱 길고 뚜렷하게 길게 이어졌다. 당시까지만 해도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수망리 마을지에는 이곳 화전마을이 4·3잃어버린 마을로 소개돼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김모, 양모, 신모, 고모, 조모 씨 등 7가구가 살았으나 제주4·3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고재원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이사장은 "1948년 항공사진을 보면 7가구 외에도 이 일대에 한 두 채씩 집터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며 이곳 예전 목장지대에서 화전이 이뤄졌음을 나타낸다고 했다.

올레가 길게 남아 있다. 특별취재팀

이 일대 화전 양상은 20세기 말 지금은 사라진 안좌리 일대에서 이뤄진 화전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안좌(安坐)는 지금의 표선면 가시리 안좌오름(벵곳오름) 주변에 형성됐던 마을이다. 한자로는 안좌악촌(安坐岳村), 안좌악리(安坐岳里), 안좌리(安坐里) 등으로 표기했다. 제주삼읍전도(1872) 등 문헌에 안좌리(安坐里) 등으로 나타난다. 20세기 초까지도 독립된 마을이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14년부터 일부는 가시리에, 일부는 남원읍 수망리, 신흥리에 병합되면서 마을 이름이 사라졌다. 현재는 가시리의 동네 이름 '안좌동'으로 남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899년 봉세관 강봉헌이 작성한 '제주삼읍공토조사성책'에는 안좌경(安坐境)에서 화전민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한 기록이 나타난다. 그만큼 오래전부터 화전이 활발히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제주 목장사와 목축문화와도 관련 있다.



중잣성 위쪽 화전마을터 자리


이곳 중잣성 위로는 예전 산마장(산장) 목장지대다. 산장은 조선 후기 제주목과 정의현의 일부 산간지대에 설치했던 목장이다. 산둔장 또는 산마장을 줄여 산장이라고 했다. 이 산장을 관리하는 사람을 산마감독관이라 했다. 증보탐라지에는 김만일(1550~1632)이 말 400필을 바쳐서, 그것으로 인해 1658년(효종 9년)에 산둔장을 설치했다고 했다.

화전민 터 석축 시설을 살펴보는 모습. 특별취재팀

돌담을 쌓아 올려 만든 인공 연못. 특별취재팀

1702년 이형상 제주목사가 순력할 때 산장 구역은 교래리 일대와 산간, 정의현의 따라비오름과 사슴이오름 일대에서부터 수망리와 한남리 위쪽 산간지대까지다. 산장(산마장)은 상장(上場), 침장(針場), 녹산장(鹿山場)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그 둘레는 200리에 달한다. 그 면적이 어마어마했음을 알 수 있다. 수망리와 의귀리 중산간지대는 산장이 들어섰다. 지금 화전 마을터가 남아있는 일대가 해당된다.

이곳 중잣성 위의 화전마을 터는 화전이 어떻게 목장지대에서 이뤄지고 경작지를 찾아 주민이 이주했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19세기 중후반이 되면서 마정(馬政)이 차츰 쇠퇴하고 중산간 지대의 국영목장에 화전이 행해진다. 1895년(고종 32) 공마제(貢馬制)가 공식 폐지된 이후부터 화전은 공식적으로 합법화된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경작할 공간이 부족했던 당시 사람들은 중산간 지대로 이주하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었다. 제주도내 대부분 중산간지대 마을이 이러한 주민 이주와 공간의 분화, 확산과 연관돼 있다.

현재 이곳은 의귀리4·3길 제2코스에 포함돼 탐방코스로 소개되고 있다. 마을 차원에서 잊혀져가는 유산에 대한 관심을 갖고 탐방코스를 만들었다. 안내문에는 4·3 이전까지 5가구 정도가 살았던 것으로 돼 있다. 오자도 눈에 띈다. 안내문을 좀 더 보완하고, 중잣성 등과 연계해서 제주 화전사와 목장사, 목축문화를 엿볼 수 있도록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특별취재단=이윤형 선임기자·백금탁 정치부장·진관훈(제주문화진흥재단)·고재원(제주문화유산연구원)·오승목(다큐제주)>

※ 이 기획은 '2024년 JDC 도민지원사업'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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