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91)배를 밀며-장석남

[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91)배를 밀며-장석남
  • 입력 : 2024. 11.12(화) 01:00
  • 오은지 기자 ejo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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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밀며-장석남




[한라일보] 배를 민다

배를 밀어 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 넣고는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 없이 밀려 들어오는 배여

삽화=배수연



꽃에서 향기를 거두어 가듯, 아침 빛이 어둠을 몰 듯이, 가을 바닷물에 배를 밀어 넣고 그 물 위로 배를 밀어내듯 사랑을 보낼 수 있다면! 아, 부드럽게 그렇게 부드러운 세상사라면 갑작스레 불가항력적으로 밀려 들어오는 배 하나쯤 감당 못하겠나 싶다가도 폭풍에 쓸린 듯 내면에 무쇠솥처럼 박히는 사랑도 믿을 만한 양식이며, 어둠 속에 배꽃떨기 같은 별이라 못 하겠나 싶다가도 잃어버린 사랑은 하나의 형체, 하나의 진실만을 들려주는 건 아니기 때문에 아! 사랑을 섬기듯 이별을 섬기려는 부드러움은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 흔들리며 눈에서 오래 붐비겠지. "한껏 세게" 배를 밀어주는 것은 연약한 육신을 밀어주는 행위이고 나의 육신에서 어렵게 밀어내는 것인데, 생사 교차의 일순간은 일만 가지 감정이 다 실리는 "아주 드문 경험"인 것인데. 그래도 서로의 마음이 침몰하는 시간에 소리 한 점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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