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전통적 농업경관 측면에서 바라보면 옛 모습이 상대적으로 풍부하게 남아있는 마을이다. 농로를 따라 꼬박 한 나절을 걸었다. 대로변에서 농로를 따라 깊숙하게 들어가면 꼬불꼬불 한가로움의 절정을 맛보게 된다. 'Healing road'라고 하는 것이 어떤 절경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밭과 밭 사이로 난 길에서 삶의 향기와 농부의 성실성과 함께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솟아나게 된다. 집과 밭 그리고 길들이 짜임을 이루는 구성방식에서 '사람은 원래 이렇게 사는 것이야!'라는 되새김이 마음속에서 자꾸 일어난다.
군데군데 팽나무들이 정겹다. 암반지대까지 파서 밭을 일구다 보니 마을 전체가 조경이 된 기분이다. 높고 낮음이 비교적 덜한 평탄지대가 대부분이라 음악으로 치면 첼로 연주와도 같이 굵으면서도 아기자기한 멜로디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곡조와 같다. 변화가 미세해 그 감성을 표현하기 힘든 악보를 한원리의 자연이라고 부르고 싶다.
마을이 생성된 이래로 두모리에 속해 오다가 1915년 두모2구로 일컬어졌고, 1953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한원리(漢原里)라고 이름 지었다. 설촌의 역사가 이토록 분명하게 전해지는 마을은 만나기 힘들 것이다. 마을 어르신들의 말씀에 의하며 1884년 부유억이라고 하는 젊은 청년이 이 지역에 들어와 경작지를 개척하고 삶의 터전을 일구어 살기 시작하자 뒤이어 1847년 김 씨, 이 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할 무렵에 인근 마을 사람들이 '서리논'이라고 마을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 뜻은 서쪽에 논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주목할 것은 약 150년, 다섯 세대가 흐르는 사이에 이렇게 많은 농경지를 개척하고 농로를 만들어 정주여건을 구축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연구가 필요한 마을이다. 단순하게 부지런함, 성실성만 가지고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봉천수를 생활용수로 사용하며 힘들게 이룩한 마을 개척의 역사는 제주의 마을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새롭게 뻗어나가게 되는 것인지 알 수 있게 하는 시금석이 되는 것이다. 마을 전체를 제주인의 개척정신을 입증해 줄 살아있는 농업박물관으로 바라보게 되는 이유는 설촌 세대의 숨결이 너무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농촌마을답게 과수원을 포함한 밭이 180㏊가 넘는다. 마을 면적이 205㏊이니 87% 넘은 면적이 농경지다. 밭을 만들 수 없는 암반 언덕을 빼고 모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토로 만들었다는 상황이 무엇을 말해주는지 분명하다. 한 뼘의 땅도 곡식이 자라는 곳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집념인 것이다.
강승일 이장에게 한원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힘을 묻자 단호한 어조로 간명하게 대답했다. "농촌다움이지요!" 사람이 사람다워야 아름답듯이 농촌이 농촌다울 때 농민이 미래가 열린다는 쉽고도 명쾌한 철학이 마을 전체 주민들의 의식 속에 뿌리내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마인드로 무장한 마을이라는 것을 외부적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 '행복농촌 콘테스트' 문화복지 분야에서 두 번이나 우수상을 받은 것이다. 이 외에도 농촌문화복지 대상 등을 두루 수상하게 되는 것은 농촌마을이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것인 지 보여주고 있는 사례로 꼽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과와 마을 공동체의 개척정신을 바탕으로 강승일 이장의 밝히는 미래비전은 농촌문화관광체험마을로 집약된다. 농촌마을이 보유한 정체성을 가장 큰 경쟁력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문화'에서 찾겠다는 것이다. 농업과 관광의 만남을 모티브로 다양한 시도가 있었지만 한원리와 같은 농업에 대한 자긍심과 품질력을 바탕으로 접목한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외부 자본에 의한 개발이 아니라 농민 스스로 주인이 되는 내생적 개발이 충분하게 가능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다양한 기관의 평가이며 주민들의 의지이기도 하다. 정보와 사회로 진입한 작금의 현실에서 '일부러 찾아가는 농촌마을 한원리'의 실질적 기반은 이미 구축되어 있다. 다양한 콘텐츠 마련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이 참으로 활기차다.
밭과 집이 공존하는 모습<수채화 79cm×35cm>
오후 3시의 태양이 나무 그림자를 지붕과 벽에 저렇게 드리울 정도면 얼마나 큰 나무가 무리 지어 있는지 유추가 가능하다. 부지런함을 저 나무처럼 키워온 조상들의 '큰 그림자'를 메시지로 그리고 싶었다. 또한 하염없이 부러운 저 창문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 그린 것이다. 겨울 초입이라 가을걷이가 끝난 밭은 쉬고 있지만 낮은 밭담이자 집담을 경계로 저 창문 안에서는 언제나 밭과 나무를 바라보게 되어 있으니 얼마나 안온한 풍경화 속에 살고 있는 것인가? 어떤 그림으로도 충족할 수 없는 현실을 창문에 그려 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을 그렸다. 천민자본주의에 찌든 사람들이 지닌 어떠한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농민의 풍요가 여기 있다. 또한 이곳 농촌이 보유한 힘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가까이 있다'는 것보다 월등한 일상성이 어디 있으랴? 눈부신 햇살의 강도를 아이러니하게도 짙은 나무와 그 그림자가 상대적으로 확인시켜주고 있으니 회화적 긴장감이 증폭된다. 지금이 겨울이라고 하지만 초록이 항시 주변에서 함께 살아가는 땅. 그 초록과 함께하는 주인공은 농민이다. 우리는 그저 조연이거나 그 감동의 혜택을 누리는 주변인이자 수혜자에 불과하다. 밭과 나무와 돌담과 집이 화면이라는 무대에서 사중창을 하고 있다. 반주는 태양광선이 하고 있는 저 아름다운 시각적 노래는 한원리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얼마나 높은 지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으니. 나무와 집이 이토록 아름다운 만남을 보유하고 있는 마을이 참으로 부럽다.
억새와 방사탑이 있는 농로<수채화 79cm×35cm>
억새들이 손짓이 바쁘다. 기울어진 각도가 보여주는 것은 하늬바람이 심하게 불고 있는 상황. 겨울날 청명한 눈부심이 역광으로 억새를 더욱 화려하게 수놓고 있다. 윤슬처럼 반짝이는 저 군무의 동작은 경쾌하고 가볍다. 그 가벼움에 날아갈까 염려되어 묵직한 돌들로 방사탑을 쌓은 것이리라. 나무들의 겨울을 표현하기 위하여 담채스타일로 까칠하고 건조하게 그렸다. 주인공인 억새를 마치 오페라의 합창단처럼 뒤에서 화음을 넣게 하였다. 멀리 희미한 푸른 빛으로 당산봉의 한 귀퉁이가 보이게 한 것은 이 위치가 어디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밭에서 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밑에 줄지어 쌓여 있는 짙은 밭담과 그 뒤에 농로가 있어서 확인이 가능하다. 그리 크지 않은 밭들이지만 그 밭과 밭 사이를 지나가며 모두를 이어주는 농로의 아름다움이 이런 시각적 관점에서 표현하게 하였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의 놀라운 아름다움을 이 겨울풍경을 통하여 확인하고 싶어서다. 가로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성 속에서 방사탑은 그 시간을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게 하는 위력을 지닌 듯하다. 저 돌탑 쌓이는 과정이나 이 마을이 이룩되어 온 과정이나 동일한 속성을 지녔음이 상징적이다. 토대를 마련하고 차곡차곡 돌을 하나하나 쌓아간 세월들. 밑돌이 없이 윗돌이 쌓일 수 없는 원초적 인과율을 무언의 메시지로 환기시켜고 있으니 그 성실성 앞에 삿됨이 범접 못하는 것. 우직한 농심이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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