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법화사는 원황실의 관심사찰이었다
-발굴로 본 법화사
최근 고고·역사학계 뿐 아니라 불교계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가 제주 법화사의 해상왕 장보고 선단과의 관련성 여부다. 세계제국을 건설했던 원 황실과의 연관성도 주목된다.
과연 제주 법화사는 해상왕 장보고 선단과 관련이 있을까.
9세기의 장보고에 의해 창건됐다는 주요한 근거중의 하나는 중국 산둥반도의 적산법화원과 청해진이 설치됐던 완도 상황봉의 법화사와 이름이 같고 동일한 신앙내용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또 법화사의 주초석이 제주현무암이 아닌 육지산으로 장보고 선단이 아니고서는 제주까지 수송이 어렵다는 점에서 제기되기도 한다.
탐라가 기원무렵부터 한반도 중국 일본을 잇는 해상교역로의 거점 역할을 해왔다는 점도 장보고 선단과의 연관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조심스럽게 제시된다.
제주 법화사는 장보고 선단에 의해 창건됐을까. 이러한 의문은 결국 법화사가 언제 창건됐느냐는 문제로 귀착된다.
서귀포시 하원동 1017번지 일대.
이곳에 수정사 원당사와 더불어 제주의 대표적 사찰의 하나인 법화사지가 자리해 있다. 사찰부지는 전체적으로 U자형 산자락이 감아도는 형세를 하고 있다.
당과의 교류로 ‘당포’(唐浦)로 불렸다는 대포리 해안은 이곳과는 4km 거리다.
8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이곳에서는 고려시대 건물지 6개소와 조선시대 건물지 초가관련시설 기와무지 등이 확인됐다.
유물로는 구름과 봉황을 양각한 운봉문 암막새와 운용문 수막새, 명문기와 등이 다량 발굴됐다. 청자와 분청사기 백자 및 중국백자편과 도기류와 함께 명문 청동등잔도 출토돼 관심을 모았다.
여기서 나온 용과 봉황무늬 막새는 왕실건축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는 금기품의 일종이다. 이는 고려 왕궁지인 개성 만월대에서 이러한 막새가 출토된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법화사의 위세와 화려함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유물이다.
하지만 운용문 막새는 육안상으로 개성 만월대 출토 유물보다 몽골 콩두미 궁전에서 발굴된 막새에 더 가깝다.
그런데 정작 법화사의 창건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창건에 대한 문헌기록이 현존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에대한 추론은 결국 고고학 발굴자료에 의존 할 수 밖에 없는 점을 감안하면 아쉬운 대목이다.
장보고 선단이 활동시기와 같은 유물로는 ‘개원통보’(開元通寶) 화폐 1점이 나온 것이 고작이다.
‘개원통보’는 당 무종(武宗) 회창(會昌)년간(841∼846)에 만들어진 화폐로 법화사지에서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유물이다. 이 유물은 전남 신안의 해저유물선에서도 출토되는 등 후대까지 지속됐다는 점에서 창건시기와 연관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장보고 활동시기에 해당되는 역사유적이 있을까.
이와관련 관심을 끄는 유적이 용담동 제사유적이다.
용담동 제사유적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회색도기와 청동제유물 철제류 등이 집중 출토된다. 때문에 법화사가 장보고 선단에 의해 창건됐다면 이를 입증하는 동시대의 유물이 발굴돼야 설득력을 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장보고 선단에 의해 법화사가 창건됐을 가능성이나 관련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 이유는 9세기 무렵의 탐라는 한반도는 물론 중국 일본등과 활발한 해상교역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탐라는 기원무렵부터 동아시아 교역루트의 중요한 길목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당시 한반도 서남해안을 주름잡았던 장보고 선단이 법화사를 창건 중간 무역 기항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은 남아 있는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법화사의 중창연대를 알려주는 명문기와가 발굴됐다는 점이다.
중창시기는 지원(至元) 6년(고려 원종 10년, 1269년)부터 지원 16년(고려 충렬왕 5년, 1279년)까지다. 무려 10년에 걸쳐 중창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확인된 것이다.
법화사는 적어도 1269년 이전 어느시점에 창건돼 있다가 이 때 대대적인 중창이 이뤄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중창시기는 원과의 관련성 면에서 매우 주목된다.
즉 법화사 중창은 고려정부에 의해 시작됐지만, 1273년에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의해 패하면서 제주는 이때부터 1백년간 원의 영향아래 들어가는 것이다. 때문에 법화사 중창의 마무리는 원의 주도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법화사에 대한 원 황실의 관심은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곳에 원의 ‘양공’(良工)이 주조한 미타삼존동불상이 안치됐던 사실이나 황제 순제의 피난궁전을 지으려 시도했다는 점에서도 짐작된다.
용과 봉황문 막새나 원대의 자기와 고급청자등 출토유물도 법화사에 대한 원 황실의 관심을 짐작케 한다.
원은 왜 법화사를 중시했을까.
제주섬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들 수 있다. 제주는 중국과 한반도 일본을 잇는 길목에 자리해 있다. 원은 두차례(1274, 1281년)에 걸친 일본정벌을 시도한 것에서 보듯이 세계제국 건설의 교두보로 제주를 인식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세계전략 차원에서 물자수탈 등 제주경영을 보다 효과적으로 도모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1백년에 걸친 원간섭기 제주에 들어와 살았던 많은 몽골세력 뿐 아니라 이들과 결합한 제주민을 위한 종교적 안식처로서의 역할도 했다.
고려후기 비보사찰이었던 법화사는 원간섭기의 제주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허심탄회한 접근 필요성을 던져주고 있다.
따라서 관련 유적·유물과의 비교 검토 및 확장발굴을 통한 자료 추가확보 등이 이뤄져야 한다. 현재 추진중인 복원사업에 대한 당국의 지원과 관심도 뒤따라야 한다. 법화사지 복원은 그 자체로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윤형기자yhlee@hall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