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역사현장' 일제 전적지를 가다(65)]

['고난의 역사현장' 일제 전적지를 가다(65)]
제3부:군사요새로 신음하는 제주-5 (2)96사단 주둔지-(4)민오름 일대
도심속 오름 日帝 거점진지 역할
  • 입력 : 2007. 05.10(목)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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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민오름에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이 구축한 1백m 길이의 갱도내부.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1백여m 갱도.포진지 구축 관심

실태조사·활용방안 등 모색해야


 시민들의 산책코스로 각광받는 민오름(제주시 오라2동 소재·표고 251m)은 일제가 남긴 전쟁의 상흔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이곳에서는 길이 1백여m·35m 등 크고 작은 갱도 5곳과 입구가 무너진 갱도 10여 곳 등이 확인된다. 오름 정상부에서는 당시 설치했던 포진지가 발견됐다. 도심속에 자리한 오름이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제주시권의 주요 군사 거점진지로 요새화 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본군이 파놓은 대형갱도는 민오름의 남서사면에 위치해 있다.<도면> 이 갱도는 총 길이가 1백10m에 달한다. 갱도의 폭은 280cm~150cm, 높이는 240cm~190cm 정도에 이르는 등 갱도 내부의 규모가 큰 편이다.

 전체적인 양상은 직선형으로 뚫린 갱도가 두 번 오른쪽으로 꺾여 들어가는 것이 특징이다. 갱도 내부에는 5개의 작은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갱도는 굵은 송이층으로 돼 있어 함몰부분이 없이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다. 갱도의 끝부분은 상향 전개되다가 밖에서부터 토사가 밀려들면서 현재는 막혀있는 상태다. 갱도 앞에는 교통호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정면으로는 남짓은오름(南朝峰)이 마주한다.

▲민오름에 구축된 갱도 내부에서 인기척에 놀라 제주관박쥐가 날아다니고 있다.

 또 하나의 갱도는 오름의 남서 사면에 있다. 길이 35m에 이르는 갱도는 일직선 구조로 돼있다. 갱도 벽면에는 갱목홈 등이 뚜렷이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취재팀은 또 민오름 정상부에서 포진지를 찾아냈다. 포진지는 둥근 형태를 하고 있는데다 5m 길이의 갱도도 함께 만들어져 있어 눈길을 끈다. 포진지는 제주국제공항을 향해 있다. 제주국제공항은 원래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육군이 만든 군사비행장인 정뜨르비행장을 확장한 것이다. 포진지는 정뜨르비행장을 방어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음을 추측케 한다.

 민오름 일대는 어떤 부대가 주둔했을까. 일본군 배치도인 '제58군배비개견도'에는 민오름이 위치한 제주시 오라동 일대가 주저항진지로 나타난다. 제주시 해안과 정뜨르비행장을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점을 고려해서 대규모 갱도 등을 구축해놓은 것이다. 이곳에는 제주시 산천단 일대에 주둔한 96사단 예하의 294연대를 중심으로 보병부대와 포병부대 등이 배치됐다. 연대본부 주둔지는 민오름 인근의 현재 난지농업연구소 일대다.

▲민오름 정상부에 구축된 포진지

 취재팀이 인터뷰한 양진현씨(오라2동 노인회장)는 민오름에 일본군이 판 굴(갱도)이 18곳에 이른다고 증언, 오름 전체가 거대한 군사요새였음을 말해준다.

 민오름은 태평양전쟁 말기에 제주시 권의 방어를 위해 주둔했던 일본군 실체를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현장인 것이다. 시민들이 즐겨찾는 도심속 공간이라는 점에서 실태조사와 함께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특별취재팀=이윤형 표성준 이승철기자

[현장 인터뷰]제주시 오라2동 노인회장 양진현씨 "보병부대.포부대 등 주둔"

 취재팀은 오라2동 노인회장인 양진현씨(1929년 생)로부터 당시 일본군과 갱도구축 상황에 대해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양씨는 "지금은 많이 무너졌지만 민오름에 굴(갱도)이 18개가 있었다"며 군속이나 신병들이 굴(갱도)을 많이 팠고, 민오름 일대에 울창했던 아름드리 소나무를 베서 갱목으로 사용했다고 말했다.

 양씨에 따르면 민오름 동쪽이 '두드리' 지경(현재 선덕어린이집 소나무 밭 일대)으로 당시 연미마을에서 주민들이 동원돼 민오름·광이오름까지 하루 세 번 갱목을 날랐다.

 양씨는 '두드리'(민오름 동쪽) 일대에는 '와다나이'(和田隊)부대가 주둔했다고 증언했다. '와다나이'부대는 기마부대이자 야전포 등을 끄는 야포부대로 1개 대대 정도 된다고 말했다.

 "말 4마리가 쇠구르마로 해서 포(야포 150mm~105mm 정도로 추정)를 끌었죠. 두드리동산에서 포를 쏘면 열안지오름 서북쪽에 떨어졌습니다."

 양씨는 또 '영이물' 남쪽 소나무 밭에는 기갑부대가 있었다며 당시 훈련모습도 볼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떼'(잔디)로 전부 위장해서 전차를 만들고는 일본군들이 그걸 공격 연습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양씨가 말한 기갑부대는 대전차부대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양씨는 계속해서 "두드리 남쪽 '활대왓'에는 보병부대로 대대급인 모리대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와다나이부대나 모리대부대 모두 '겐부다이'(玄부대·96사단을 일컬음) 소속이었다는 것.

 "선덕어린이집 아래 활대왓에 야포가 있었고, 도노미(정실마을의 다른 이름)에 포부대가 있었습니다. 월정사 서남쪽 동산에 고사포 2문과 해태동산(제주국제공한 인근)에도 고사포부대가 있었죠."

 당시 미군 함재기가 나타나자 해태동산에서 고사포 쏘는 걸 목격하기도 했다고 양씨는 말했다.

 양씨는 이어 현재 난지농업연구소 일대가 96사단 예하 연대본부 자리라고 말했다. 난지농업연구소 북쪽 밭은 일본군 병원이 자리했다. 병원은 함바집으로 지었는데 숙대낭 껍질로 해서 지붕을 덮었고, 당시 숙대낭 껍질을 벗기기 위해 관음사까지 갔었다고 회상했다. 또 해방 후에 병원 함바집을 뜯어다가 오라국민학교를 짓기도 했다. 갱도 내부의 갱목들도 뜯어다가 집을 짓기도 했는데, 갱목을 빼가면서 굴이 많이 무너졌다고 설명했다.

 양씨는 당시 공출에 대해서도 재봉틀을 징발하고, 정동화로와 유기 등을 가져가는 등 무척 심했다고 말했다.

 양씨는 이와함께 민오름 갱도에 얽힌 일화도 소개했다. 해방 후에 갱도 안에 재봉틀을 묻었다고 해서 육지부 사람이 와서 굴을 팠던 사례도 있다는 것. 또 일본군들이 갱도 안에 무기를 놓고 폭파시켰다는 말이 나돌아 해방 후에 발굴신청을 하고 경찰에서도 '위험지구'란 팻말까지 붙였었다고 말했다.

/이윤형기자 yhlee@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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