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호에서 본 일본 나가사키항 남서쪽의 하시마 전경. 외관이 마치 군함을 닮아 군함도라 불리기도 한다. 이승철 기자
바다 위 거대한 콘크리트 괴물 같은 '군함도'수천명 강제동원 사실 모르는 관광객들 북적
일본 나가사키항에서 남서쪽으로 약 19㎞ 떨어진 하시마. 일명 군함도(군칸지마)라 불리는 하시마는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거대한 콘크리트 괴물 같았다. 해저 탄광인 이곳은 일제가 한국인 수천 명을 강제 노역시키고 가혹한 노동을 강요하면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통한의 섬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어 우리나라는 물론 주변국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역시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어긋나고, 주변국의 반발을 부를 수 있다"며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취재팀은 지난해 10월 일제강점기 한인 수천 명이 강제동원돼 혹독한 고통에 시달렸던 이곳을 찾았다.
나가사키항 토기와터미널에서 하시마를 오가는 페리호에 올라 20여분 항해했을까. 멀리 거친 바다위에 콘크리트 회색 성벽으로 둘러싸인 하시마가 나타났다. 페리호에 탄 70여명의 눈길이 일시에 쏠렸다. 10여m 높이의 콘크리트 제방으로 둘러싸인 하시마는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섬 모양은 바다 위의 군함을 빼닮았다. 왜 군함도라는 별칭이 붙었는지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군함도라는 이름은 1920년대 언론기사에서부터 불리기 시작했다. 미츠비시중공업 나가사키조선소에서 건조중이던 전함을 닮았다는 데서 군함도로 불리게 된 것이다.
배가 선착장에 닿자 대부분 일본인 관광객들은 가이드의 안내로 콘크리트로 굴 입구처럼 만든 통로로 쏟아져 들어갔다. 이 통로는 섬의 유일한 출입구로 강제 동원된 한인들은 '지옥문'이라고 불렀다.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힘들다던 지옥문에서 한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시마를 두고 한인들이 '지옥섬', 혹은 '감옥섬'이라고 한 이유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지옥문을 지나자 앙상한 골조만 남은 콘크리트 건물이 황량하게 펼쳐졌다. 사람들이 살지 않는 유령의 도시가 이런 걸까.
하시마는 처음엔 남북 320m, 동서 120m, 표고 40m 정도의 바다 위 작은 여울에 지나지 않았다. 현재 크기의 3분의 1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1810년에 석탄이 발견되면서 섬의 운명은 달라졌다. 섬은 1890년 대표적 전범기업인 미츠비시 소유로 넘어가고 1891년부터 본격적인 해저탄광으로 석탄을 채굴하기 시작했다. 이후 6차례에 걸쳐 콘크리트를 쏟아부어 매립을 하면서 남북 약 480m, 동서 약 160m, 둘레 1200m에 면적은 6만3000㎡로 확대됐다.
미츠비시가 본격 해저탄광 개발에 나서면서 석탄 채굴량은 증가하게 되고 인구도 자연스레 늘어났다. 석탄을 한창 채굴하던 1960년 무렵 섬의 인구는 약 5300명에 이르렀다. 당시 섬의 인구밀도가 도쿄의 9배나 될 정도였다니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많은 인구를 수용할 시설이 필요했다.
도쿄보다도 앞서 일본 최초의 고층아파트가 1916년 하시마에 건설된 이유다. 1941년에는 연간 채탄량이 41만1100톤에 이를 정도로 번성을 누렸다. 섬 안에는 4~10층 규모의 고층 아파트와 병원, 초중학교, 시장 등 완벽한 도시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70여동의 건물이 좁은 섬 안을 채우고 있었다.
▲하시마를 찾은 일본인 관광객들. 뒤로 뼈대만 남은 저탄 벨트컨베이어가 보인다.
하지만 하시마는 주요 에너지가 석탄에서 석유로 바뀌면서 쇠락하기 시작 1974년 1월 폐광하기에 이른다. 일본인 가이드의 말처럼 일본 경제가 한창 부흥을 누리던 시기에 하시마는 멈춰버렸다.
하시마 해저탄광은 일본 근대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탄광이었다. 1891년부터 1974년 폐광때까지 약 1570만 톤이나 되는 품질 좋은 석탄이 해저탄광에서 채굴돼 나가사키 조선소 등 일본의 근대화에 이용됐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가운데 하나로 하시마 해저탄광을 나가사키 조선소 시설 등과 묶어서 세계유산에 등재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지옥문을 지나면 마주치는 것은 저탄 벨트컨베이어 시설로 사용했던 콘크리트 기둥이다. 정선된 석탄을 벨트컨베이어로 저탄장에 저장하기 위한 용도였다. 저탄장의 석탄은 운반선에 실린 뒤 나가사키 조선소 등 일본 각지로 보내졌다. 지금은 콘크리트 기둥만이 남아있지만 한인의 강제노역 현장은 생생하다.
섬에는 해저탄광으로 진입하는 주력 갱도의 흔적이 남아있다. 붉은 색 벽돌로 지어진 종합사무소와 하시마병원, 초중학교 건물들도 볼 수 있다. 일본 최초의 아파트 건물도 유리창은 떨어져 나갔지만 외관은 멀쩡한 상태였다. 70여동의 건물 가운데 주거용과 업무용 시설을 제외하고 광산시설은 대부분 붕괴된 상태이다.
하시마의 번성기를 떠받친 것은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한인과 중국인들의 눈물과 고통이었다. 이들은 해수면 아래 깊이 1000m 이하 지점까지 내려가 석탄을 채굴했다. 하루 12시간씩 40도까지 올라가는 해저 막장에서 석탄을 캐는 고통스런 나날이 이어졌다. 한인들은 일본 근대화와 침략전쟁을 위한 도구로 내몰린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역사적 사실과 아픔에 대해 일본 정부는 외면하고 있다. 산업화를 이끈 현장으로서 중요하지 강제징용과 같은 역사의 아픔은 고려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인 관광객들 역시 세계유산 등재 추진 소식에 하시마를 찾고 있지만 한인의 강제 징용 사실 등은 모르고 있었다. 하시마는 영화와 뮤직비디오, 게임, 드라마, 소설의 무대로 자주 등장하지만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드러내지는 못하고 있다. 이는 침략전쟁을 부인하고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일본 사회의 우경화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