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역사현장 일제전적지를 가다](146)제주·일본 제4차 해외비교-(2)하시마 탄광의 한인들

[고난의 역사현장 일제전적지를 가다](146)제주·일본 제4차 해외비교-(2)하시마 탄광의 한인들
지하 1000m 넘는 갱도에서 생사 넘나드는 중노동
  • 입력 : 2014. 01.29(수) 00:00
  •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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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군함도와 함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중인 나가사키 항구에 있는 조선소는 태평양전쟁 당시 한인 4700여명이 징용돼 군함 등을 건조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승철기자

1944~45년 800여명의 한인 동원 추산
해안가 건물 아래 '함바'서 짐짝생활

하시마는 폐허가 된 해상도시라고나 할까. 유리창이 떨어져 나간 고층아파트가 즐비하게 서있다. 일본 최초의 아파트 건물의 외관은 비교적 멀쩡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해안 쪽 아파트 아래층은 주로 한인들이 생활했던 공간이다. 해안 쪽 건물은 파도와 바람 등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 공간에서 한인들은 중노동에, 열악한 생활환경에 짐승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감옥섬 하시마에 한인들은 언제부터 끌려갔을까. 하시마 해저탄광에 한인들이 끌려간 시기는 1917년부터로 알려진다. 이후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이 전시총동원체제에 들어가면서 강제동원 한인 수는 해마다 급격히 늘었다. 그렇지만 하시마 해저탄광 강제 동원 한인의 규모와 피해 실태 등은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나마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2012년 10월 조사실태보고서를 공개하면서 그동안 묻혀져 있던 하시마 해저탄광 한인들의 강제동원 실상이 일부나마 드러났다.

강제동원위원회는 1944년부터 1945년 사이에 하시마에 많게는 800여 명에 이르는 한인이 동원된 것으로 추산했다. 해저탄광에 강제 동원 됐다가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 한인은 122명이다. 한인들은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

지하 1000m가 넘는 갱도에서 석탄을 캐다보면 바닷물이 안으로 쏟아지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탄광 안에는 메탄 등 가스 돌출 위험이 있는 구간에는 한인과 중국인이 투입됐다. 이렇다보니 탄광 안에서 가스폭발 사고로 사망한 한인도 상당수에 이른다.

민족적 차별 또한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일본인과 한인의 차별은 거주공간에서도 일어났다. 하시마는 바다 가운데에 있어서 파도가 칠 때면 아파트를 덮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한인들은 해안에 있는 건물 아래층 '함바'에서 짐짝처럼 생활해야 했다. 10㎡ 정도 되는 공간에 8명이 살았다는 증언이 있을 정도이니 얼마나 열악한 거주환경이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반면에 섬의 중앙부 고지대와 일조량이 양호한 고층 건물 등은 일본인의 차지였다.

하시마의 한인들은 1945년 8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자 복구작업에 투입되기도 했다. 식민시기 겪었던 한인들의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폐허가 된 해상도시 하시마에는 일본 최초의 아파트 건물 외관이 멀쩡하게 남아있다. 해안쪽 아파트 아래쪽은 한인들의 생활 공간이었다. 한인들은 1917년부터 하시마로 끌려가 해저탄광에 강제 동원됐다.

괴물 같은 섬 하시마에 1시간 정도 머물렀을까. 관광객들은 건물들을 뒤로 하고 섬을 서서히 빠져나갔다. 섬을 오가는 페리호는 다시 관광객들을 태우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는 섬을 천천히 돌더니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섰다. 일명 '군함도'로 불리는 섬의 이름처럼 완벽한 '군함'의 모습을 실감할 수 있는 위치였다. 일본인 가이드는 관광객들에게 사진촬영을 유도했다. 그리고 반대편 사람들을 위해 배의 방향을 바꾸어주기도 했다. 사람들은 하시마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일본이 군함도와 함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곳은 나가사키 항구에 있는 조선소 시설이다. 일본이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자국의 근대화를 이끈 산업시설이라는 것이다. 하시마에서 나가사키 항으로 돌아오는 페리호에서는 거대한 철제 기둥과 선박건조 시설들을 볼 수 있다. 미쓰비시 중공업에 의해 현재도 가동되는 나가사키 조선소 시설이다.

하시마 뿐만 아니라 나가사키 조선소에도 수많은 한인들이 동원됐다. 태평양전쟁 당시 약 4700여명이 징용돼 군함 등을 건조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가운데 1600명은 1945년 8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될 당시 숨졌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역사적 아픔과 사실을 외면한 채 근대화를 이끈 산업시설이라는 이유를 내걸고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우리나라와 중국 등 주변국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강제동원과 침략의 역사에 대한 반성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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