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문학의 현장](2)현기영의 '순이삼촌'-2

[4·3문학의 현장](2)현기영의 '순이삼촌'-2
"떼죽음에서 살아남은 자 모두 순이삼촌"
  • 입력 : 2008. 01.11(금)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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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밭을 배경으로 제법 길게 늘어선 4·3 당시의 북촌리성. 마을에 남아있던 여자, 노인과 어린이들이 허기진 배를 움켜쥐며 무거운 돌덩이를 져날라 쌓아올린 눈물겨운 돌담이다. /사진=김명선기자mskim@hallailbo.co.kr

수많은 순이삼촌이 쌓아올렸을 조천읍 북촌리성
시체 치우고 허기진 배 채울 새 없이 축조에 동원
밭담·올레로 흩어진 돌멩이는 그 날을 기억할까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중에 누구 한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중에 누구 한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순이삼촌')

떼죽음의 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여인 순이삼촌. 그만큼 후유증이 깊었던 사람이 있었을까. 사건의 와중에 오누이를 잃었지만 그의 뱃속엔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

시체가 널브러져 있던 옴팡밭에서 다시 일상을 살아가는 당신. 옴팡밭엔 고구마를 갈았다. '송장거름을 먹은 고구마는 목침덩어리만큼 큼직큼직했다.' 더운 여름날이면 고구마가 심어져있는 그 옴팡밭으로 가 김을 맨다. 호미끝에 툭툭 걸리는 흰 잔뼈와 녹슨 납탄환. 순이삼촌은 끊임없이 출토되는 그것들을 밭담밖의 자갈더미속에 묻었다. 조용한 대낮일수록 콩볶는 듯한 총소리의 환청에 시달린다.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농협창고 뒷편엔 겹담으로 된 성(城)이 남아있다. 찬겨울 초록 마늘이 언땅을 비집고 나와있는 밭을 배경으로 그것은 제법 길게 늘어섰다. 길이 25m, 높이 4m에 이른다. 성이 온전하게 남았으면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을까. 돌담에 서로 질기게 엉겨붙은 담쟁이덩굴이 오랜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북촌리 사람들은 섣달 열여드렛날의 끔찍한 죽음에 이어 밤새 마을이 불타는 광경을 목격한다. 이튿날 아침, 독한 연기를 뚫고 들어간 마을에선 내집, 네집을 구분할 새가 없었다. 집구석 어디쯤에 있는 타다 남은 좁쌀, 고구마를 퍼담아 등짐 하나씩 지고 인근 함덕으로 소개했다. 두어달쯤 되었을까. 소개령이 해제돼 북촌리로 돌아온다. 김석보 북촌리4·3유족회장은 '고사리 꺾는 철'에 3~4개월간 함덕에 있다가 북촌으로 돌아왔던 기억을 떠올렸다.

북촌리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들을 맨 처음 맞은 것은 시체들이었다.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된 주검을 치우고 비바람을 가릴 움막을 짓는 일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을 쌓는 일이 시작된다.

▲학살의 현장인 조천읍 북촌리 너분숭이 근처에 지어지고 있는 북촌4·3기념관. 공간을 무엇으로 채울지 고민이다.

"부락민들은 순경들의 감독을 받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눈팔 새 없이 허기진 배를 안고 성을 쌓지 않으면 안되었다. 말하자면 전략촌 건설이었다. 불탄 집터의 울담도 허물고 밭담도 허물어다가 성을 쌓았다. 그것도 모자라 묘지를 두른 산담까지 허물어다 날랐다. 순이삼촌도 임신한 몸으로 돌을 져날랐다."('순이삼촌')

마을에 남은 건 노인과 어린이, 여자들뿐이었다. 소설속에선 성을 쌓는 역사가 거의 두달 가까이 걸렸다고 썼다. 돌덩이를 놓치는 바람에 발등을 찍히는 아이들도 많았다. 가까스로 완성된 성은 마을 사람들을 가둬놓는 창살이 됐다. 밤이 되면 성안에 갇혀 꼼짝할 수 없었다. 밤마다 초소막을 지키는 일도 마을에서 맡았다.

북촌리성은 모두 3차에 걸쳐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마을 외곽으로 2차, 3차 성을 축조했다. 15개가 넘는 보초막을 만들어 남녀노소 구분없이 마을사람들이 스물네시간 교대근무를 섰다. 무려 3년이란 세월동안 성을 쌓고 지키는 과정을 계속한 셈이다. 하루종일 축성작업에 동원되어 일해도 고작 밀가루 한되가 손에 안겼다.

북촌리 김택씨(72)는 어머니를 이어 2대째 동네에서 상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 흔한 간판 하나 없는 가게다. 갸냘픈 소녀의 몸으로 쌓아올렸을 돌덩이들은 북촌리성 어딘가에 잠들어있을 것이다.

"그때 산 거사 삶이라?" 김씨는 지게를 이용해 돌을 져날랐던 것이나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되는 대로 거처를 만들었던 일 등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당시는 누구를 원망할 겨를도 없었다고 한다. 다들 그렇게 살아야 했으니까.

그 시절을 통과한 여성들의 삶은 한층 고달펐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집안의 남자들이 어디로 숨어들어가 일본으로 밀항했을 때 남겨진 가족에겐 또다른 고통이 뒤따랐다. 아이들에게, 노인에게, 여성들에게 아버지와 형, 아들, 남편이 숨은 곳을 대라는 회유와 협박이 이어졌다. 소설속에선 그런 장면이 그려진다. 서청 출신의 순경들이 아이들에게 양과자를 주며 아버지와 형이 숨은 곳을 가르켜달라고 꾀어낸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대밭을 가리키고, 외양간 밑이나 조짚가리 밑을 판 굴을 댔다. 여성들은 어땠을까.

"순이삼촌도 그런 식으로 당했다. 지서에 붙들어다놓고 남편의 행방을 대라는 닦달 끝에 옷을 벗겼다는 것이었다. 어이없게도 그건 간밤에 남편이 왔다 갔는지 알아본다는 핑계였는데, 남편이 왔다 갔으면 분명 그짓을 했을 것이고, 아직 거기엔 분명 그 흔적이 남아있을 테니 들여다보자는 것이었다."('순이삼촌')

순이삼촌은 옴팡밭에서 한발짝도 벗어날 수 없었다. 옴팡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쉰여섯의 여인. 제주섬에 몰아닥친 광풍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누구나 순이삼촌이다. 이미 60년전 그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허위허위 세월을 헤쳐오며 그 날을 머릿속에서 지우려할수록 기억은 더 또렷해졌다.

수많은 순이삼촌이 쌓아올렸을 북촌리성의 돌덩이들은 4·3을 거쳐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야 제자리를 찾았다. 다시 밭담으로, 올레로, 산담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바람숭숭, 제주섬의 어디메 돌담 사이로 순이삼촌의 사연이 넘나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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