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문학의 현장](30)김석범의 '까마귀의 죽음'-1

[4·3문학의 현장](30)김석범의 '까마귀의 죽음'-1
공항에서 흰수건 나오면 스무살 그 여인
  • 입력 : 2008. 09.19(금) 00:00
  • 글자크기
  • 글자크기

▲도쿄의 재일동포 밀집지 중 한 곳인 우에노에서 만난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씨는 "지금 이 나이에도 혁명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때로 나직한 목소리로, 때로 탁자를 치며 4·3이 걸어온 지난한 여정과 우리앞에 놓인 과제를 풀어냈다. /사진=김명선기자 mskim@hallailbo.co.kr

대마도에서 만난 가슴잃은 여자가 들려주던 사연
정뜨르비행장 끌려가면서 흰수건 싸매 징표 남겨
"지옥 건너온 밀항자에게 4·3을 묻는 게 아닌데…"


벌써 5시간을 넘겼다. 인터뷰를 끝내고 일본 도쿄 우에노(上野)에 있는 한국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후였다. 몇 잔째 맥주를 들이키며 말을 이어가는 작가는 지친 기색이 없었다. 때로는 탁자를 세게 내리치며 격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나이에도 혁명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씨(83). 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4·3을 직접 겪지 않았다. 재일동포 김시종 시인이 4·3을 체험했으면서도 그 기억에 압도당해 침묵해온 것에 견준다면 그는 쉬지않고 4·3을 써왔다.

▲지금의 나이에도 혁명을 하고 싶다는 김석범. 그의 눈을 보면 그게 가능해 보일지도 모른다. /사진=김명선기자

그 작업의 첫 머리에 '까마귀의 죽음'(1957)이 놓인다. 50여년전, 이 작품을 쓰지 않았다면 작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거라 말한다. 허무주의에 빠져들었을 무렵 쓴 이 소설로 인해 작가는 겨우 고독을 밀어낼 수 있었다.

"기준은 처형의 마지막까지 지켜보았다. 무수한 시체의 산더미가 경찰을 태워온 트럭에 실려 가까운 밭에 버려졌다. 마을 사람들의 손으로 그 시체들은 한곳에 아무렇게나 판 커다란 구덩이속에 눈과 함께 묻혔다. 기준은 소장의 말을 생각해냈다. 그리고 그때 묘하게 굳어지던 소장의 넓적한 얼굴을 머리에 떠올렸다… 인간의 피를 먹은 밭은 곡식이 잘 자란답니다. 농사꾼들은 그래서 좋아하고 있지요."('까마귀의 죽음')

1988년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온 소설집 '까마귀의 죽음'에는 표제작을 비롯해 '관덕정', '간수 박서방' 등 4·3 연작 세 편이 들어있다. 4·3이 일어나던 해, 작가는 대학생이었다. 일본으로 밀항한 제주 사람들을 통해 섬에서 벌어진 엄청난 사건을 듣는다. '까마귀의 죽음'처럼 온전히 작가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4·3 소설도 있지만 일본에서 만난 피해자가 던져준 충격이 녹아든 것도 있다. '간수 박서방'은 그런 작품이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리는 것이 역시 무섭수다. 너무나 무섭수다. 용담 아줌마, 용서하십서… 하지만 나는 반드시 훌륭하게 죽을 거우다. 두고 보십서…이 하얀 수건이, 내가 이 세상에 남긴 단 하나의 보람이었수다."('간수 박서방')

1950년 오사카 이카이노(지금의 이쿠노)에 살던 때의 일이다. 9촌뻘 되는 삼촌이 20대 중반이던 작가에게 쓰시마(대마도)로 가서 조천 출신 밀항자를 데려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전등도 들어오지 않는 창고 같은 곳에서 제주에서 온 여인을 만났다. 지옥같은 섬에서 벗어나 몰래 배를 타고 낯선 땅에 웅크린 여인에게 대뜸 4·3에 대해 물었다.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질문을 했는지…." 작가는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고문 후유증으로 가슴을 도려낸 그 여인이 들려주던 어느 사형수의 사연은 60년이 다 되어도 잊지 못한다.

흰 수건을 몸속에 몰래 감춰둔 여자였다. 스무살쯤 됐다. 수용소 안의 할머니가 병이 들어 수건이 필요해도 내놓지 않았다. 여자는 학살터인 정뜨르 비행장으로 향하기 전, 붓과 먹을 가져오라고 부탁해 흰수건에 이름을 쓰고 그걸 허벅지에 묶는다. 몸이 썩어 문드러져도 수건위의 먹은 남는다. 훗날 어머니와 할머니가 시신을 찾으러 오더라도 딸을, 손녀를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 거다. 만일 공항 발굴현장에서 이름과 나이, 출신마을이 적힌 흰수건이 나온다면? 작가는 지난해 봄 제주국제공항에서 내내 그 생각에 휩싸였다.

▲작가 김석범이 조동현 도쿄 제주 4.3을 생각하는 모임대표와 함께 우에노의 밤거리를 걸어가고 있다.

제주를 방문하고 난 뒤 꼭 기행문을 내는 작가는 월간 '수바루(すばる)' 2008년 2월호에 '간수 박서방'에 나오는 송명순의 모델이 된 여자 이야길 썼다. 제주국제공항 4·3 유해 발굴 현장에 갔던 경험을 적은 것으로 뼈들이 전하는 증언을 들은 듯 통곡하는 작가의 모습이 어린다. 작가에게 사형수 이야기를 전해준 가슴없는 여인은 이쿠노에 살다가 북송선이 처음 왕래할 무렵 북한으로 갔다. 차마 제주도를 고향이라 부를 수 없었을 여인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그 길 뿐이었다.

/도쿄=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도쿄서 4·3 알리기 20년째…동포들 인식변화는 더디어

▲재일동포 열명중 아홉명은 제주출신이 살고 있다는 도쿄 아라카와구, 불고기점, 김치가게 등으로 북적였던 곳이지만 지금은 하나들 문을 다는 가게가 늘고 있다.

일본 오사카에 이쿠노가 있다면 도쿄에는 아라카와(荒川)가 있다. 아라카와구는 인구 19만명중 7천명이 재일동포들인데, 그중 제주출신이 95%를 차지한다.

모든 걸 빼앗긴 채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흘러든 제주 사람중 도쿄에 거주하고 있는 이들은 대개 오사카에서 건너왔다. 4·3 직후엔 오사카에서 도쿄까지 급행열차를 타더라도 12시간이 걸렸다. 오랜 시간을 들여 도착한 일본의 수도에 둥지를 튼 그들은 불고기 가게, 김치가게, 한복점 등을 운영했다.

한때는 이들로 아라카와 뒷골목 시장이 북적거렸지만 지금은 텅 빈 가게가 여럿 보인다. 90년대 이후엔 가방제작이나 '미싱'일이 중국 시장에 밀리면서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택시 운전대를 잡아야 했다. 아라카와에 사는 재일동포 젊은이들에겐 가업을 이으며 생계를 꾸리는 일이 다른 나라 이야기다.

'화산도'의 작가 김석범씨를 주축으로 도쿄에서는 일찌감치 4·3 알리기 작업이 진행됐다. 1988년부터 추모제가 열렸다. 하지만 진상규명 운동의 걸음에 비해 재일동포들의 인식 변화는 더디다.

아라카와에 사는 조천읍 함덕리 출신 현정선씨(81)는 제주농업학교에 재학중이던 1947년 6월 검거를 피해 일본으로 밀항한 이다. 미군 깃발을 만들어 환영할 때만 해도 해방이 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했다. 당시 양과자 반대운동을 벌였던 그는 일본에서 먹고 사느라 초콜릿도 팔고 양주도 팔았다며 '허허' 웃었다.

현씨는 "산에서 내려와 밀항한 재일동포중에는 죄책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면서 "이들말고도 혹독한 교육을 받아서인지 아직도 두려움에 떨며 4·3을 말하지 못하는 제주출신 동포들이 있다"고 말했다. 지난 4월 4·3 60주년 재일동포 방문단에 속해 제주를 찾았던 그는 "4·3희생자임에도 남로당원이었다는 이유로 4·3평화공원 위패봉안소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도 했다.

/도쿄=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2549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