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문학의 현장](27)한림화의 '한라산의 노을'-2

[4·3문학의 현장](27)한림화의 '한라산의 노을'-2
저 산 어디쯤에서 승리의 꿈을 꾸었다
  • 입력 : 2008. 08.22(금)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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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빛 바다위에 뜬 비양도 너머로 제주섬이 보인다. 저 멀리 섬 한가운데 솟아있는 한라산이 제주섬을 감싸안고 있는 듯 하다. 지난한 현대사를 굽어보고 품어온 한라산은 치열한 4·3의 현장이었다.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48년 무장봉기에서 54년 금족령 해제까지 긴 투쟁
한라산이 없었다면 그렇듯 처절히 싸울 수 있을까
오름과 한라산에 흩어진 숱한 죽음의 사연 기억을


소설속 문장 그대로였다. 요며칠 한라산은 좀처럼 그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제주사람들의 눈에 걸리는 게 한라산이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다. 하루에도 스물여덟번 넘게 변하는게 제주 날씨라고 했던가. 구름에 가려진 한라산은 입을 꽉 다문채 말이 없다.

"한라산은 좀체로 정상을 드러내지 않는다. 어쩌다 슬쩍 맨몸을 드러낸 게 더할 나위 없이 부끄러운 여인네처럼 보여줄 때도 있다. 그런 한라산을 본 제주 사람들은, 어, 한라산 꼭대기를 봤으니 오늘 재수는 따논 당상이라 하면서 즐거워한다."('한라산의 노을')

장편소설 '한라산의 노을'(1991)을 쓴 한림화씨는 '한라산이 없었다면'이라고 물었다. 한라산이 제주섬 한가운데, 그곳에 있지 않았더라면 무장 세력이 그렇듯 싸울 수 있었을까. 제주섬 곳곳에 삐라가 펄럭이며 떨어졌던 1948년 음력 2월 스무나흘, 양력으로 4월 3일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의 세월이 얼마인가. 참으로 오랜 시간 저항했다. 제주섬 지리에 어두운 '육지'토벌대가 강도를 높이면 높일 수록 산사람들은 더 깊숙이 한라산으로 들어가 그들을 맞받아쳤다.

'한라산의 노을'에 나오는 이덕구의 아내 희복은 한라산을 보며 혼잣말한다. 저 산 어디쯤에서 돌이 아방(이덕구)은 이 싸움에서 승리하리란 꿈을 꾸고 있겠거니라고. 이덕구 뿐인가. 불미대장, 농사꾼, 잠수들이 한라산으로 걸어들어갔다. 누군가 '세상이 아무려면 어때서, 이 물막힌 섬에 사는 무지렁이 주제에 뭘 어쩌겠다고 산에 숨어들어'갔냐고 묻는다. 그러면 '무지렁이'들은 말한다. "살 도리 햄주." 한라산에서 그들은 제주사람들 잘 사는 방법을 찾는다.

4월 3일 지서 습격 이후에는 한라산으로 향하는 발길이 한층 늘어난다. 마을에서 살 형편이 안돼 코흘리개에서 40~50세 장년층까지 숱하게 산으로 오른다. 소설속 이덕구는 이들에게 "산에 올라와도 고생 뿐이우다. 혁명은 우리에게 맡기고 가서 생업에 종사합서"라고 호통치지만 사람들은 분노를 터뜨린다.

"아래에서는 산과 내통하는 자들이라고 눈에 보이기만 하면 잡아간다. 산에서는 집에 가서 살라 하지만 집에서 살 수 없어서 산에 온 게 아니냐. 결국 우리는 아래도 무섭고 산에도 못 붙어볼 입장이니 죽을 목숨이여."('한라산의 노을')

작가는 인디언 친구가 전해주던 사라져가는 종족의 이야기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제주섬 백성들의 처지가 인디언 멸망사와 무엇이 다를까. 평화협상에 나섰던 경비대 연대장 김익령 중령이 제주주둔 미군 중대장인 맨스필드에게 "우리를 인디언처럼 소탕해도 무방한 식민지 백성이라고 방관하는 것은 아니겠죠?"라고 묻는 소설 대목은 아직도 섬사람들의 죽음은 끝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소설은 결말로 치달을수록 피냄새가 짙어진다. 4·3때 있었던 온갖 죽음의 유형과 별의별 고문 사례가 멈추지 않고 이어진다.

마른 냇가 자귀나무에 목매달아 죽이곤 하던 돼지처럼 아이를 그렇게 죽인다. 불질러버린 마을에 다시 나타나 탕건 뜨는 여인네가 앉아있는 방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한다. 살점이 고깃덩어리처럼 흩어진다. 좋을 일이 있을거라며 열여섯살 이상에서 예순살까지의 남자를 바닷가 모래밭에 모아놓고는 기관총을 걸어놓고 쏴 죽여버린다. '여기저기에서 피는 강물을 이루어 바다에 쏟아졌고 수위는 자꾸만 높아갔다.'

그래도 그 피바다에서 허우적 대며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다. 바다에서 빠져나와 뭍에 발을 디딘 게 꿈만 같았던 사람들. 이 꿈이 깨지지 말았으면 싶지만 이야기는 쉬이 끝나지 않았다.

소설은 1950년 예비검속자들이 끌려가 죽은 송악산 섯알오름 탄약고터에서 비로소 마침표를 찍는다. '멜젓 담듯이' 포개진 시체더미에서 '어멍'의 연을 맺은 여인을 찾는 외침이 터져나온다. 한라산에, 그 아들딸인 오름에 퍼지던 피울음이 지금도 어딘가에 메아리치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은 불과 50~60년전에 벌어진 일이다.

▲한라산 입산 금지가 해제된 이듬해인 1955년 한라산 백록담 북측에 세워진 '한라산 개방 평화기념비.



한라산 전체가 4·3유적

4·3으로 8년간 봉쇄됐던 영산…금족령 해제이후도 총성 소리


"제주민중이 일어선 참뜻은 백 번 되뇌이는 그것, 꿈에서조차 잠꼬대처럼 외치는 완전독립된 나라, 해방된 민족끼리 단합하여 서로 해코지 않고 사는 거였는데. 뭔가? 당신들은 어디서 불쑥 나타나서 우리의 지도자 행세를 하는가? 왜 당신들은 제주민중을 형제로 여기지 않고 오직 당의 과업을 완수하는 데 이용하는 도구로 취급하는가?"

'한라산의 노을'에 등장하는 양성례의 말을 빌어, 소설은 4·3을 제주섬 민중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벌인 독립운동으로 그려낸다. 제주 사람들의 '독립 운동'을 끝내려는 토벌대의 추격은 끈질겼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를 보면 제주경찰은 무장대 섬멸을 위해 1952년 100전투 경찰사령부를 설치하는 등 엄청난 인력을 투입해 한라산을 샅샅이 뒤진다.

토벌작전은 1954년까지 이어졌다. 그해 8월 새로 취임한 제주도경찰국장은 오랜 기간 잔존무장대 5명의 행적이 드러나지 않자 9월 21일을 기해 금족령을 해제해 한라산을 전면 개방한다. 이듬해 이를 기념하듯 백록담 북측에 '한라산 개방 평화기념비'를 세운다. 빗돌 뒷면에는 '영원히 빛나리라. 제주도경찰국장 신상묵씨는 4·3사건으로 8년간 봉쇄되었던 한라보고를 갑오년 9월 21일 개방하였으니 오즉 영웅적 처사가 아니리요. 다만 전도는 기여된 자유와 복음에 감사할지어다'라고 새겨져있다.

평화기념비가 들어섰지만 무장대 진압작전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1957년까지 한라산 중턱에서 무장대와의 교전이 벌어졌다. 마지막 무장대 오원권을 그해 4월 생포해서야 한라산에서 총소리가 멈췄다.

제주땅 사람에게 한라산은 제주도의 다른 이름이다. 섬 가운데 우뚝 솟은 한라산을 경외하듯 보며 자란다. 섬 사람들이 4·3으로 생사를 넘나들었듯 한라산도 똑같은 곡절을 겪었다. 무장대든, 피난 주민이든, 토벌대든 한라산에 저마다 애환이 깃들어있다. 한라산이 곧 4·3유적인 이유다.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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