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문학의 현장](12)문무병의 '살의노래, 피의노래, 뼈의노래'

[4·3문학의 현장](12)문무병의 '살의노래, 피의노래, 뼈의노래'
설운 조상 홀목심엉 실컷 울고 가십서
  • 입력 : 2008. 04.25(금)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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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죽은 영혼들이 이곳에 왔을까. 4·3 큰굿을 찾은 유족들이 간절한 염원을 담아 절을 올리고 있다. /사진=김명선기자 mskim@hallailbo.co.kr

바다·땅·한라산에서 죽은 영혼 거두는 굿시
굿판이 아니면 풀어낼 수 없는 기막힌 사연
망자와 산 자가 만나는 '영개울림'을 하듯


'허공중에 흩어진 넋이여,/ 살은 썩고 녹아 흙이 되고, 뼈로 남은 혼백이여,/ 북촌 옴탕밧에서 죽어간 영혼이여,/ 알뜨르 비행장에서, 표선 백사장에서,/ 원동 주막번대기에서 총살당한 조상들이여,/ 지름불에 타 형체마저 녹아버린 몸천이여,/ 그날 박성내다리에서/ "살려줍서!" "살려줍서!" "살려줍서!" 하며,/ 처절하게 죽어간 무차 기축년의 사람들이여,/ 이디 오랑 원미 한그릇 소주에 게알 안주 먹엉 갑서,/ 설운 조상 홀목심엉 엉엉 실컷 울고 가옵소서'('살의 노래, 피의 노래, 뼈의 노래')

3대 독자인 남편을 잃었다고 했다. 형무소로 끌려갔다는 말만 들었을 뿐, 그 이후의 행방은 모른다. 바닷속에 빠트려 죽어버렸을까, 그렇게 짐작할 뿐이다. 조천읍 선흘리 부순아(82) 할머니. "눈앞에서 사람 죽는 거 하영 봤다"는 할머니는 죽기전에 그 얘길 꼭 하고 싶다고 했다. 중학생 둘하고 머리가 허연 하르방이 조천 만세동산으로 끌려왔는데 토벌대 혼자 그 세 사람을 한꺼번에 죽이더라고 했다. 지금도 그 장면은 잊혀지지 않는다.

4·3 60주년이 되는 날이던 지난 3일 제주시청 앞마당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4·3 50주년에 이어 10년만에 4·3큰굿이 그곳에서 열렸다. 할머니는 젊디젊은 나이에 죽은 남편의 영혼이 그곳에 올까 싶어 큰굿을 찾았다. 눈앞에서 죽어간 여린 영혼을 달래주려나 싶어 큰굿을 찾았다. 굿판이 아니면 풀 수 없는 기막힌 사연을 가진 사람이 그 여인 뿐일까.

열흘뒤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에서는 '찾아가는 현장 위령제'가 펼쳐졌다. 의귀·한남·수망리에서 4·3때 희생된 넋을 달래는 해원 상생굿이었다. 유족들은 구덕(대바구니)에 정성껏 음식을 장만하고 당(堂)을 찾아들듯 의귀리사무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4월, 두 개의 굿판이 마련됐다. 바다에서 죽은 영혼을 거두고, 땅에 묻힌 영혼을 저승으로 보내고, 아직도 구천을 떠도는 행방불명된 영혼을 달래고, 한라산에서 죽어 바람길에 묻힌 영혼을 따듯한 곳으로 모시는 자리였다. 이곳에 문무병(58) 시인이 있었다.

▲이중춘 큰심방이 4·3큰굿 초감제를 집전하고 있다.

'제주도 도깨비당 연구', '제주도 굿의 연극성에 관한 연구', '제주도의 신굿', '제주도 사신(蛇神) 신앙 연구'등의 논저에서 보듯 그는 오랫동안 굿을 붙들어왔다. 제주굿 연구 햇수가 36년에 이른다.

2000년 도서출판 각에서 나온 문무병 시인의 '날랑 죽건 닥밭에 묻엉'은 문학과 굿이 만난 '해원굿시집'. 표제작은 이재수난을 다룬 작품이지만 대부분 4·3을 노래하고 있다. '살의 노래, 피의 노래, 뼈의 노래'도 그중 하나다. 4·3 큰굿 현장에서 시인은 '날랑 죽건 닥밭에 묻엉'에 실렸던 4·3 굿시를 깁고 보탠 시편들로 굿판을 이끌었다.

'이제 굴 밖으로 나오십서/ 그리하여 연기에 막힌 가슴 미어지는 고통을/ 한숨 크게 들이쉬어 풀어내고, 시국 잘못 만난 탓에 억울하게 죽었느니,/ 더 이상 굴속에 버려지지 않겠다 하시고,/ 찢겨진 육신 썩은 살, 뼈다귀로만 항변하던 그 누명의 옷을 벗으십소서/ 내 한 몸 뉠자리 없던 추운 겨울과 음습한 여름 장마의 곰팡이를/ 바람에 불리고, 굴 밖으로 나오십서.'('다랑쉬굴에 흩어진 열 한 조상님네 넋은 넋반에 담고, 혼은 혼반에 담아 저승 상마을로 도올리저 합네다')

시인은 무가에서의 그것처럼, 곶자왈 바람속에 묻고 깊은 바다에 가라앉은 길 잃은 영혼을 하나하나 불러낸 뒤 저승 상마을로 가서 나비로 환생하길 염원하고 있다. 이번 4·3 큰굿에서 초감제, 무혼굿 요왕맞이, 시왕맞이, 차사영맞이 등 네 마당으로 나눠 혼백이 편안하게 저승가는 길을 닦아주듯 시인은 굿시를 쓰며 4·3 영혼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을 편안히 떠나보내려 한다.

일찍이 시인은 4·3의 눈물어린 이야기를 들었다. 1989년 창립한 제주4·3연구소의 초대 사무국장을 맡은 이가 그였다. 4·3증언집인 '이제사 말햄수다' 1~2권도 그의 손을 거쳤다. 증언자들이 이름을 밝히길 꺼리던 시절, 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채록한 4·3의 '진실'은 시인에게 큰 자극이 됐다.

병든 환자에 새 생명 주듯 굿시 쓰며 해원·상생 염원

문무병 시인의 '굿시론'


"굿에서 노래하는 심방의 사설이 병든 환자의 마음에 신명을 불어넣어 새로운 삶으로 재생시키는 힘이 있다면,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시(詩)이며, 이러한 무가시(巫歌詩)가 굿의 기능을 가지고 연행될 때, 이것을 나는 '굿시'라 하고자 한다."

문무병 시인은 두번째 시집 '날랑 죽건 닥밭에 묻엉' 첫머리에 실린 '이 아이, 넋들여 줍서'에서 그렇게 적었다. 1만 8천 신을 품고 있는 섬땅의 시인은 4·3때 억울하게 죽은 넋을 깨우며 굿시를 쓴다.

4·3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가 있다. 해원과 상생이다. 시인은 해원과 상생이야말로 제주굿이 품고 있는 원리라고 말한다.

굿에 '영개울림'이라는 것이 있다. 영개는 영혼을 뜻하는 제주어. 이승에서의 한을 모두 풀어내고 편안히 저승으로 갈 수 있도록 위무하는 자리다.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영개울림이 펼쳐지면 울음바다가 된다. 심방(무당)은 죽은 이가 되어 말한다. 살아생전의 소회, 죽어간 사연을 읊다보면 절로 눈물이 난다. 살아있는 자들은 마치 죽은 영혼이 다시 깨어나 이야기를 하는 듯한 그 말을 들으며 눈물을 훔친다.

시인은 "굿에서 '영개울림'은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을 화합하고 절충할 뿐만 아니라 개선하고 창조한다"면서 "이는 시간의 개념이 해체된 마당에서 민중사를 엮어온 수많은 인물들이 오늘의 민중과 서로만나 '영개울림'을 통해 삶의 체험을 영적으로 교류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에게 해원은 바람을 잠재우듯 억울한 죽음을 정당화해주고 의로운 죽음으로 자리매김해 위령하는 의식이다. 상생은 저승으로 가는 죽은 자와 이승에 남은 산 자가 더불어 산다는 의미다. 망자의 한을 풀어주는 일은 이승에 남아있는 산 자의 몫이다. 시인은 오늘도 굿판을 마련하고 굿시를 쓰며 구천에 못오른 혼백을 쓰다듬고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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