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 고사리가 융단처럼 깔린 숲길에 은신처로 쓰였을 둥그런 돌담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가는 소설을 쓰는 동안 '이덕구 산전'을 여러차례 오르며 느슨해진 마음을 다잡았다고 했다. /사진=김명선기자 mskim@hallailbo.co.kr
무장대 총책 이덕구의 마지막 순간은 어땠나"도민 흘린 피 누군가 책임져야" 소설속 자살한라산 자락 돌담 막사엔 깨진 그릇만 뒹굴어
며칠째 폭염이 이어지고 있었다. 산전으로 향하기 전부터 땀이 쏟아내렸다. 5·16도로를 따라가다 교래방면으로 방향을 틀었다. 물찻오름으로 향하는 시멘트길로 1.5㎞ 정도 오르니 내(川)가 보였다. 부근에 차를 멈췄다.
노오란 칠을 몸뚱이에 살짝 발라놓은 나무가 길잡이였다. 누리끼리하게 피어났다 흰색으로, 다시 남색으로 변하는 도채비꽃(산수국)이 일행을 반기더니 작살나무, 산딸나무, 산뽕나무, 때죽나무 따위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하늘로 쭉쭉 뻗은 잡목들이 그늘을 내줬다.
숲을 헤치고 냇가를 건너 35분쯤 걸었을까. 이끼낀 돌이 둥그렇게 쌓아올려진 곳이 나타났다. 그 위로 조금 더 걸음을 옮겨놓으니 비슷한 모양의 돌담이 또하나 보였다. 이름해서 '이덕구 산전(山田)'. 조천읍 교래리 지경에 있는 산전은 1949년 봄 이후 무장대 총책 이덕구가 이끄는 부대가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졌다.
'섬에 태어난 죄' 연작 소설을 쓰고 있는 김창집씨(60)는 1년 동안 이곳을 대여섯차례 올랐다. 홀연히 떠난 어느 겨울날엔 해가 일찍 떨어진 산길에서 컹컹 짖어대는 짐승소리를 견디느라 오싹했던 기억이 있다.
한여름 산전은 지난 4월 제주작가회의 문학기행에서 만났던 풍경과 사뭇 달랐다. 관중 고사리가 융단처럼 깔린 숲길에서 막사가 되어준 돌담을 간신히 찾아냈다. 땅에 반쯤 박힌 깨진 그릇은 여전했지만 왠일인지 산전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무쇠솥은 보이지 않았다. 이 일대는 제주읍 봉개리 사람들이 토벌을 피해 숨어들었던 곳이다. 그들은 훗날 이덕구 산전으로 이름붙여진 곳까지 올라 은신생활을 했다.
이덕구 부대가 머물렀고, 중산간 사람들이 몸을 숨겼던 곳. 한 시대를 뜨겁게 살다간 그를 위해, 4·3의 넋들을 위해 동행한 작가는 한라산 소주와 감귤을 올렸다.
제주는 섬이다. 본토와 멀리 떨어진 이곳은 유배의 땅이었다. 4·3 무렵 섬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다를 건너는 일 뿐. 그렇지 못하면 목숨을 건지기 위해 산으로 올라야 했다. 작가는 "섬이 아니고 어느 쪽이 육지로 이어졌다면 얼마든지 피신이 가능해 4·3의 양상이 달라졌을 것이고, 죄없는 민간인의 희생도 많지 않았을것"이라고 했다. 눈물겨운 말이다. 섬에 태어난 게 죄라니.
연작소설 여덟번째인 '산전'은 이덕구의 마지막이 어땠을까, 왜 죽었을까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무장대에게 별천지였던 물장오리가 초토화되자 이덕구 부대는 산전으로 옮겨온다. 산전에 남은 무장대원들은 패잔병처럼 바짝 엎드려 있는 형국이었다. 이대로 더 버텨야 할 것인가?
시시각각 이덕구를 옥죄오는 토벌대. 소설은 오사카로 피신한 이덕구의 형 이좌구가 동생에게 일본으로 건너올 것을 권유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제까지 잘 버텨왔지만 앞으로 잡히면 개죽음이라는 것, 일본에 와서도 조국의 인민을 돕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설득했지만 이덕구는 거절한다.
"세상은 우리가 꿈꾸었던 대로 변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많은 인민들이 죄없이 죽어갔습니다. 우리가 정당한 이유로 봉기했다하더라도 그로 인해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 미쳤다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잘잘못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역사가 판단하리라 믿습니다. 이제와서 제가 그곳으로 건너가 생명을 부지한다고 하여 몇 백년이나 살며, 그 삶이 떳떳하겠습니까?"('산전')
잠옷이 되고, 외출복이 되는 옷을 몇달째 입고 산중에서 지내는 이덕구. 눈을 붙이면 악몽에 시달린다. 처참하게 죽어간 이들이 내 팔 내놓아라, 내 다리 내놓아라 하며 어깨에 매달린다.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무장대의 상징적 존재였던 이덕구가 1949년 6월 7일 사살된 것으로 나온다. '지난 7일 오후 4시경 속칭 작은가오리 부근 정글 속에서 반도 사령관 이덕구 부대와 교전끝에 이덕구를 사살하는 한편 그의 보신부하 1명을 포로하였다'는 언론보도도 소개됐다. 작가는 과연 경찰이 이덕구를 쏘아죽였을까라고 묻는다. 같은 보고서에서 당시 시신을 확인했던 이덕구 외조카의 증언을 덧붙여놓은 대목 때문이다. "시신은 관자놀이에 총알 1발 맞은 것 외에는 깨끗했습니다"라는.
"더 이상 총을 쏘지 마세요. 지금 사령관님은 자결한 것 같습니다." 소설의 말미, 관자놀이에 뚫린 조그만 구멍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던 장면은 이덕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걸 드러낸다. 십자가를 지듯 이덕구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리라. 작가는 그렇게 믿는다.
▲이덕구와 부대원들이 늘상 긴장하며 오르락내리락 했을 산길엔 산수국이며 조릿대가 그득했다.
"옥이든 돌이든 희생자"
우직한 문체로 써나간 연작'옥석'에서 '산전'까지 8편
그가 섬의 역사를 공부하고 오름을 누빈 게 십수년이다. 제대로 된 소설을 쓰려면 제주를 깊이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됐다.
김창집씨의 연작소설 '섬에 태어난 죄'는 제주민예총 문학위원회가 냈던 '섬의 문학' 창간호(1995)에 처음 실렸다. 애초 연작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1998년 '제주작가' 창간호에 '섬에 태어난 죄-해원'을 발표하면서 연작의 형식을 띤다.
계간지로 바뀐 '제주작가' 2008년 봄호에 수록된 '산전'을 포함해 지금껏 나온 '섬에 태어난 죄' 연작은 모두 여덟편이다. 나중에 '옥석'으로 이름붙인 첫 작품은 강석, 강옥 형제를 통해 4·3때 도민이면 무장대든, 토벌대든 상관없이 희생자였음을 그렸다. '해원'은 제주 무속굿에 등장하는 '영게울림'에서 모티브를 끌어내 다랑쉬굴의 참상을 담았다. 연좌제 문제를 다룬 '상흔', 4·3당시 여성의 피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왜곡', 무장대와 토벌대 희생자로 갈린 위령제를 통해 4·3의 지난함을 그린 '귀향'등도 잇달아 '제주작가'를 통해 발표됐다. 이중 '우화'는 청소년 4·3교육 교재를 염두에 두고 쓴 작품. 토끼, 독수리,불곰 등을 등장시켜 4월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섬이라는 지리적 환경에서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는 백성들의 모습을 우직한 문체로 써내려갔다. 무지랭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건을 증언하듯, 그들의 시선으로 4·3을 담아왔다. 제주어로 나누는 인물들의 대화에 가위눌린 상처가 있고, 까닭모를 죽음이 있다.
연작 소설은 모두 두 글자 제목이다. 조만간 선보일 아홉번째 이야기 역시 '협상'이란 제목을 달아놓았다. 제주사람들은 왜 죽창을 들 수 밖에 없었나를 파헤치게 될 작품이라고 했다.
4·3 60주년, 작가도 올해 나이 60이 됐다. 작가는 "뜻깊은 이 해를 그냥 넘길 수 있겠느냐"고 했다. 연말쯤 연작을 한데 묶은 단행본을 낼 예정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