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문학의 현장](25)허영선의 '무명천 할머니'

[4·3문학의 현장](25)허영선의 '무명천 할머니'
울담아래 쪼그린 여자 '끅끅' 울음 우네
  • 입력 : 2008. 08.08(금)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 글자크기
  • 글자크기

▲'무명천 할머니 삶터'에서 먼지 앉은 방바닥을 걸레로 훔쳐내던 시인이 잠시 허리펴고 할머니의 유품을 보고 있다. 턱을 싸매던 희디흰 무명천 등 할머니의 유품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유리장 위로 총격을 당하기 전 얼굴이 담긴 젊은 날의 사진이 걸려있다. /사진=강희만기자 hmkang@hallailbo.co.kr

서른다섯 나이에 경찰 총격으로 아래턱 잃은 여인
3월 단장한 무명천 할머니 삶터엔 쓸쓸한 방명록
"링거 맞지 않고 잠들 수 없는 고통 알 길이 없네"


문이란 문은 모두 닫혀있었다. 5개월만에 다시 찾은 집. 잠시 망연해졌다. 시인은 문을 열어 숨통을 틔운 뒤 영정앞에 절을 올렸다. 그리곤 수돗가로 달려갔다. 세숫대야에 얼른 걸레를 빨고선 방이며 부엌바닥을 닦아냈다.

진아영(1914~2004). 1949년 1월 한경면 판포리에서 경찰의 총격으로 아래턱을 잃은 여인. 서른다섯이었다. 여인은 아래턱을 천으로 싸맨 채 살았다. '무명천 할머니'란 이름은 그래서 붙는다.

허영선 시인(51)은 할머니를 몇차례 만났다. 월령리에서 살다 고령으로 건강이 악화될 무렵 성이시돌양로원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도 봤다. 자잘한 꽃무늬가 프린트된 손수건으로 턱을 감싼 얼굴에서 노란꽃이 당장 피어날 것 같았다. 겁에 약간 질린 듯 하면서도 어린애같은 웃음을 그리더라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진 못했다.

'울음이 소리가 되고 소리가 울음이 되는/ 그녀, 끅끅 막힌 목젖의 음운 나는 알 수 없네/ 가슴뼈로 후둑이는 그녀의 울음 난 알 수 없네/ 무자년 그날, 살려고 후다닥 내달린 밭담 안에서/ 누가 날렸는지 모를/ 날카로운 한 발에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턱/ 당해보지 않은 나는 알 수가 없네/ 그 고통 속에 허구한 밤 뒤채이는/ 어둠을 본 적 없는 나는 알 수 없네'('무명천 할머니')

음표처럼 흩어지던 언어. 여인은 고통조차 발화하지 못했다. 턱이 소실되면서 아파도 아프다 말할 언어를 빼앗겼다. '링거를 맞지 않고는 잠들 수 없는', '홀로 헛것들과 싸우며 새벽을 기다리던' 깊은 고통을 진정 알길 없다고 시인은 고백한다.

지난 3월, 고인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힘을 보태 한림읍 월령리 거주지를 단장한 '무명천 할머니 삶터'엔 그런 생이 조용히 물결친다. 턱을 잃기 전의 얼굴이 담긴 액자 아래 놓인 거울 앞에서 눈질끈감고 턱을 싸맸을 여인을 생각해본다. 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줬을 신신파스 옆의 머리핀, 목걸이, 립스틱 따위는 그도 여자였음을 말해준다.

'무명천 할머니-월령리 진아영'이 첫머리에 실린 허영선 시인의 두번째 시집 '뿌리의 노래'(2004)엔 유독 여인의 이야기가 많다. '여인열전'으로 그것들을 따로 모아놓기도 했다. 연미마을 고난향, 상천리 강도화 할머니, 남원 고사리 김할머니, 고내리 홍 보살님, 현정생 할머니, 문임생 할머니, 조천리 김인생 할머니, 옹포리 김 할머니, 양화옥 할머니…. 기자 시절, 시인이 만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공통된 숫자는 4·3이었다. 4·3을 건너뛰고 제주사의 인물을 취재할 수 없었다.

'보리순도 안 뵈던 그해 사월이던가, 오월이던가/ 침침하던 이슬 새벽, 갈적삼 검정고무신/ 흰 광목 머릿수건 얹고 내달렸다/ 쑥대밭 질러 우묵진 돌 굴헝밭/ 매운 마늘 씨앗 꽂듯 속눈물 꽂아 놓고/ 휭 돌아앉아 한라산을 이마에 감쌌다'('1993년 5월, 고 할머니')

4·3 당시 연미마을에서 홀로 여섯아들 키우다 그중 다섯을 잃은 여인. 빨갱이 누명을 쓰고 10개월간 옥살이했다. 만삭의 몸으로 4·3을 당해 아이 잃은 남원리의 김할머니도 있다.

'갈적삼 통몸빼에 궂은 피 계곡으로/ 콸콸 쏟아져 내렸으나/ 너를 어쩌지 못했다 아가야/ 내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내 몸은, 검붉다 못해 뜨거운 용암덩이/ 나의 몸은 나의 몸이 아니었다 아가야'('죽은 아가를 위한 어머니의 노래')

무명천 할머니도 갔고 연미마을 고 할머니도, 문임생 할머니도, 옹포리 김 할머니도, 조천리 김 할머니도 세상을 떴다. 그들은 세상을 잘도 견뎠다. 깊디깊은 바윗돌처럼, 억새게 땅을 움켜쥔 늙은 뿌리처럼. 그러니 남아있는 자들도 '뿌리의 노래'가 읊었듯, 견딘만큼 더 견뎌야 되는 것일까.

'무명천 할머니 삶터'에 놓인 쓸쓸한 방명록에 누구는 '남아있어 살아가야 할 나날들이 숙연하다'고 적었다. 삶터를 단장할 때만 해도 찾는 이가 많아 어쩔까 싶었는데 방구석 곰팡이가 피고 먼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정낭을 올려놓으며 집을 나서는 시인의 걸음이 무거워보였다. 켜켜이 개어놓은 이부자리며, 가스렌지 위 냄비를 보며 할머니가 금세 돌아올 것 같지 않느냐고 물었던 시인이다.

'지금 대명천지 훌훌 자물쇠 벗기는/ 베롱한 세상/ 한 세상 왔다지만/ 꽁꽁 자물쇠 채운 문전에서/ 한 여자가 슬픈 눈 비린 저녁놀에 얼굴 묻네/ 오늘도 희디흰 무명천 받치고/ 울담 아래 앉아 있네/ 한 여자가'('무명천 할머니')

▲4·3후유장애로 사람 만나길 꺼렸던 고인은 이제 무명천을 내려놓고 기껍게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한림읍 월령리 무명천 할머니 삶터.



몸에 새긴 4·3의 기억

후유장애인 146명 4·3 희생자로…재심의 불인정 13명 행정소송중


무명천 할머니는 지금, 그 몸 하나 뉘일만한 공간에서 기꺼이 방문객을 맞고 있지만 생전엔 사람 만나길 꺼렸다. 음식도 제대로 못먹었다. 이 땅을 떠나는 날 무명천을 비로소 내려놓은 여인은 4·3의 비극을 온 몸으로 증거했다. 허영선 시인의 말처럼 그는 4·3과 제주사, 여성과 인권이 응축된 인물이었다.

누군가 '몸에 새긴 역사의 기억'이라 했다. 고인처럼 4·3 당시 신체적·정신적 피해로 고통받고 있는 후유장애인들이 있다. 4·3특별법엔 후유장애인들을 4·3희생자로 규정해놓았다. 정확한 4·3 후유장애인수는 모른다. 다만, 지금까지 제주4·3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4·3위원회)를 통해 후유장애인으로 신고한 이가 2백1명에 이르고 이중 1백46명이 희생자로 결정됐다.

"병원에서 엑스레이 촬영을 하려고 해도 여러번 재촬영을 해야 할 정도로 기형이 심각합니다. 옆으로 눕더라도 오른쪽 옆구리 상처때문에 한쪽 다리를 오므려야 합니다. 하루라도 남들처럼 편히 누워서 자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병원에서는 퇴행성이라고 진단했습니다. 4·3때 매맞고 고문 당해서 고통받았지만 죽지 못해 힘겹게 사는 지금의 상황을 어찌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59년전 총상으로 인한 통증은 여전하고, 현재 다리가 심하게 저리는 증상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통원치료와 재활·물리치료는 받고 있지만 정기적인 약물치료가 필요합니다. 4·3위원회가 이같은 사실을 인정해주었으면 합니다. 저는 4·3후유장애인입니다."

4·3후유장애인으로 인정받지 못한 13명은 4·3위원회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벌이고 있다. 4·3의 충격을 몸으로 껴안고 있는 후유장애인들에겐 그것이 또다른 고통이다. 이들은 "우리에게 의료지원은 부차적인 문제다. 4·3당시의 부상과 그로 인한 후유장애를 사실로 인정받고 싶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1292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