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말 산지천이 복개됐을 때는 이 지역이 빨래터로 이용됐으며 주민들의 더위를 식히기 위한 목욕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2000년 6월부터 산지천 정비복원공사가 이뤄져 지금의 모습으로 변했다. /사진=강경민기자
사라봉 ~ 도두봉 코스 총 거리 9.99km20여개소 용천수가 해안선 따라 분포
산물여행 제2코스인 '사-도 산물'은 사라봉에서 도두봉까지 코스로 총 거리가 9.99km에 이르며, 20여개소의 용천이 해안선을 따라 분포하고 있다. 걸어서는 2시간30분 정도, 자전거로는 40분 정도 소요된다.
▶건입동 산물='건입'이라는 유래는 신라시대 고을방의 15대손 고후, 고청과 그 아우가 신라에 갔다가 이곳으로 돌아왔다고 해 지어진 지명이라고 한다. 또 24방위의 하나인 건방의 맥이 들어왔다고 해서 건입(建入)이란 지명을 붙였다고도 한다. 이 지역은 산지천 하류의 포구로, '건들개'라고도 불리어지고 있다.
건입동은 옛부터 육지와 교역의 중심지로 제주항과 산지천을 중심으로 어업과 상업을 주산으로 해 발전해 온 마을이다. 4·3의 아픔과 의녀 김만덕의 애민정신이 깃든 곳으로, 사봉낙조와 산포조어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포구가 큰 동네다.
건입동에는 거슨샘이, 망한이물(망애물), 물나는굴, 금산물 산물군, 산지물(산저천, 산짓물), 노리물(노릿물, 녹천) 등의 산물이 있다.
건입동 금산수원지 일대는 물이 풍부하고 내가 발달해 있었다. 지금은 도시개발로 내가 매립됐고, 산물도 일부가 멸실됐거나 금산수원지로 사용되고 있다. 이 금산물 산물군에는 녹천(광대천, 방대천)이 있었는데, 녹천을 이두식 한문표기로 볼 때 '나루에 있는 우물'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지장깍물(지장샘이)은 금산물이 동으로 와 솟는 물을 말하며, 수원지 부근 예전 발전소 앞에 있는 산물이다. 여름에는 물이 얼음같이 차고 맛이 좋았다고 한다. '지장'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것으로 볼 때 동자복과 관련이 있을 것을 추측되고 있으며, 옛날 이 근처에 지장보살을 모셨던 당집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서귀포 서홍동에도 지장샘이라고 하는 호종단 전설이 있는 산물이 있듯 호종단의 혈맥설화와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금산물은 수원지에서 비상용수로 사용되고 있는데, 지장깍물 서쪽에 있는 물로 '금산'은 암벽으로 벼랑을 이룩 곳으로 나무들이 많아 풍치가 수려하고 나라의 말림갓이라고 해서 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하기 위해 사람들을 함부로 통행할 수 없도록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물에서 포구로 내린 물을 광대물이라 하는데, 지금은 도로로 매립됐지만, 금산물에서 내리는 물은 용진교 하부로 흘러들고 있다.
산지물은 공진정과 삼천서당 밑에 내리던 물이다. 산지란 땅 이름이며, 그 땅에 흐르는 하천을 산지천이라 불렀다. 옛 문헌에 산지천은 가락천이라고도 했으며, 제주성 동남쪽 성밖에 있고 큰 돌 아래에 큰 구멍이 있어 그곳에서 물이 솟아 나온다. 산지천 상류는 건천이지만 하류에서는 가락쿳물, 산지물, 지장깍물 등 용천수가 솟아나면서 제주시 중심부를 흐르고 있다.
▶삼도동 산물=옛 제주읍성이 남문일대로 삼성신화의 부을나가 활을 쏘아 터를 잡은 땅으로, 천년의 역사를 이어온 탐라왕국의 왕성터인 묵은성과 탐라의 행정중심지였던 목관아지가 있는 지역이다. 삼도동에는 제주도의 모든 역사의 현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지역으로, 옛부터 제주도민의 광장으로 사용된 보물 제322호 관덕정이 있다.
삼도동에는 탑알(탑바리) 산물군이 있다. 제주최대의 먹돌산지(알작지)로 유명했지만 탑동매립으로 해안가의 산물과 함께 모두 매립돼 사라져 버렸다. 질아랫물(소여물, 기러기물)은 오리엔탈호텔 자리에 있었던 물로, '탑알' 서쪽 바닷가에 있었던 우물이다. 여기에 작은 여가 있어 소여물이라고도 했다. 논깍물은 라마다호텔로 진입하는 병문천 하수처리장에 있었다. 썰물 때는 물이 바다 밑으로 숨었다가 밀물 때 솟는 물로, 무근성 사람들의 주 급수원이었다.
▶용담동 산물=용담동에는 탐라국 시대에 원거리 항해의 무사안전을 빌었던 제사유적을 비롯 용두암 등 신화와 전설을 풍부하게 간직한 곳이다. 영주 십경의 하나인 용연야범으로 유명한 용연과 옛 제주교육의 중심인 제주향교가 있다.
해안도로를 포함한 용담동에는 한두깃물·버랭이깍물·생이물 등 병문천 산물군을 포함해 선반물, 말물, 용숫물, 서한두기물, 멩감통물, 다끄내물, 돌샘이, 어영물, 몰래물, 말물 등의 산물이 많다.
말물은 제주향교 안에 있는 물로 하루 밤 새에 한말정도 나왔다고 해서 말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과 '탐라지'에서 "이 산물을 마시면 백보를 능히 날 수 있었는데, 호종단이 와서 그 혈을 막았기 때문에 없어졌다"고 나와 있다.
/최태경기자 tkchoi@hallailbo.co.kr
[ 산물여행, 스토리를 입다 ] 지장샘 설화를 중심으로
풍수에 대해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물과 인물과의 관계에 대해 한두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생각해보시라. 인물은 좋은 터에서 나온다. 좋은 환경에서 원만한 성격의 사람이 나오고, 좋은 부모 밑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얘기를 끝까지 들어보시라. 나 역시 타고난 운명보다는 개인의 노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런 얘기는 위에서 언급한 '면학 분위기' 조성 차원에서 하는 말이다.
물과 관련된 전설 중에서, 제주도에는 특히 호종단에 관한 전설이 유명하다. 전설은 몇 백 대를 걸쳐 내려온 무의식과 집단의식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여기에는 여러 대를 거치는 사이에 합의된 지혜가 숨겨져 있다. 이는 우리 세대가 그대로 듣고 다음 세대에 '원형 고대로' 전해줘야 하는 무형문화재이다.
그 옛날 중국 송나라 때. 송나라 황제가 지리서를 살피다가 제주도의 지세가 보통이 아님을 알아보고 호종단(胡宗旦)이라는 풍수사를 제주에 파견한다. 목적은 제주도의 혈을 끊는 것. "제주도 곳곳을 다니며 인재가 나올 만한 땅의 맥을 잘라버려라, 제주도에서 인물이 태어나 송나라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아예 싹을 자르라…." 뭐 이런 식의 주문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호종단이 제주에 와서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느냐는 건데. 호종단은 제주도 동쪽 종달리에서 서귀포를 거쳐 서쪽 차귀도까지 두루 다니면서 산천의 정기를 제압한다. 찾은 맥의 생혈에 침을 꽃아 제압하고 긴 칼로 맥이 흐르는 주요 통로를 잘라버린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어떤 곳이 생혈이냐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호종단이 주로 찾아다닌 곳은 물혈이었다. 호종단은 아무 데나 손을 대지 않고 생혈의 핵심인 물혈만 집중적으로 단혈(斷穴)했다.
이후부터 제주도에 물이 귀해졌다고 했던가. 아니 호종단이 제주에 오기 전부터 물이 귀했던가. 그런 논의는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자. 호종단이 두루 거친 곳은, 제주도에서 이른바 용천수라 불리는, 땅에서 물이 저절로 솟아나는 장소였다. 물을 찾아 사람이 몰려들면서 급기야 마을이 형성된 곳이었다. 그런 곳이라면 앞에서 말한 좋은 면학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리라는 추측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인재가 나오지 못하도록 호종단이 제주도 각지의 물혈을 잘랐다는 전설. 여기에 제주도 옛 어른들의 녹록찮은 통찰과 지혜가 스며들어 있다. 깊은 사색을 하게 만든다. 비단 제주도의 물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본토의 땅에 비해서 물이 귀했다는 점. 또 제주도에서 생산된 먹는 샘물이 현재 대한민국 전체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사람들이 선호한다는 사실. 이는 제주도 물의 우수성을 반영하는 좋은 예다. 품질 좋은 물과 인물의 탄생. 정말로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을까.
<제주인적자원개발지원센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