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제주살이] (29)밤 산책

[황학주의 제주살이] (29)밤 산책
  • 입력 : 2022. 04.12(화) 00:00
  • 편집부 기자 hl@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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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밤 날씨도 춥지 않아 밤 산책을 간다. 그래도 밤공기를 쐬는 일이니 얇은 털옷을 위에 걸치고 커다란 원형 플래시를 손에 들고 나가면 반달이 마당 위에 떠 있다. 대개 자정 지나 잠이 오지 않을 때 대문을 열고 나가는 것인데 문밖을 나서자마자 닭 울음소리를 들어야 한다. 건넛집에 한밤중 사람 발자국 소리가 나면 우는 닭이 있다. 어디 불 켜진 데라도 있는지 두리번거리는 갈망하는 어두운 영혼 하나의 마지막 깨어 있는 꿈의 불빛 한 조각을 쫓아오는 것 같은 닭의 울음소리가 희미해지다 꺼질 때쯤 길은 작은 골목에서 마을길이 된다.

마을길에 들어서면 '신촌리 위험 구간 도로'라 부르는 꼬부랑길이 시작된다. 최근 길가 감귤밭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중간 중간 S자로 꺾이는 부분들을 3차선 폭으로 넓힌 도로를 중산간에서 해안마을 쪽으로 걸어 내려가는 것이다. 눈앞에 일자형으로 펼쳐지는 환한 불빛들은 신촌포구에서 함덕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민가, 상가 혹은 가로등, 고기잡이 불빛들이 서로 겹친 것이다. 그중엔 자지 않고 깨어 있는 자신들의 망상을 설명하려는 불빛이 있으며, 크고 환해 눈이 부신 불빛의 몇 걸음 뒤에서 마른 우물 같은 거친 불빛이 어느 벽면에 붙어 있는 경우도 있다. 텅 빈 객석 같은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불빛은 어떤 시간이 무대에서 내려온 뒤에도 꺼지지 않는다. 누군가 들여다보는 수면에 비치는 희미한 불빛 속에는 시대의 앞부분을 밝히고 사라진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내가 들고나온 플래시 불빛은 지나가는 차량에게 사람이 있다는 신호를 줄 수 있고, 갑자기 나타나는 들개를 쫓을 수 있게 해준다.

제설함이 길가 좌우에 놓여 있는 경사길을 내려간다. 그 시간에 지나가는 사람은 한 명도 없으며, 다음 조와로 골목까지 내려가는 동안에 승용차 두 대 정도가 지나갈 뿐이다. 가장 꺾임이 심하고 하강 각도가 큰 길목에 있는 민가 앞에서 나는 돌아선다. 반달이 따라 내려오다가 내가 뒤돌아 오던 길을 올라가기 시작하자 따라 올라와 준다.

밤의 길이가 열 시간 정도 되는 계절이다. 이 밤 별 이유 없이 밤을 새우는 사람이나 바다 위에서 씨름하는 고기잡이 어부나 내일의 장사를 위해 재료를 준비하는 식당 주인에게도 길동무가 필요하며, 이 밤이 긴 사람에게도 짧은 사람에게도 행운이 필요하다. 동행인과 떨어지는 밤이 될 수도 있겠지만, 달이 자석처럼 이끌리듯 모두 사랑에 이끌려 살아가기를 빌어보자. 술꾼 하나가 조천읍 목수상점 셔터에 기대어 비틀거리거나 어느 여행자가 월정리 카페로쥬 예쁜 골목에 예상치 않게 들어와 머뭇거릴 수도 있는 밤이다.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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