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13)한림읍 금악리

[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13)한림읍 금악리
서부 중산간지역의 핵심적인 자연자원 마을
  • 입력 : 2022. 08.26(금) 00:00
  •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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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자연을 따라 마을이 생겨나고 마을을 따라 길이 생긴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하는 진정 귀중한 곳이다. 수류촌(水流村)이라고 부르던 400여 년 전 설촌 당시에 자신들은 물론 후손 대대로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고 집을 짓기 시작했을 것이다. 목축과 농경에 필요한 물 자원이 높은 중산간 지역에 이토록 풍부하게 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니까. 지금도 습지가 15개 정도 있으니 생태적 관점에서 후손들에게 이 가치를 온전하게 전해야 하는 책임감을 느끼게 하는 마을이기도 하다.

금악리라는 마을 이름은 오름 이름 금악(今岳)에서 왔다. 150년 전쯤에 이렇게 마을 명칭을 바꿔 부르게 됐다고 한다. 면적이 2869㏊나 되는 큰 마을이다. 4·3 이전까지 모습은 지금과는 달랐다. 금악봉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옹기종기 모여 살던 가름들이 있었다. 웃동네, 중가름, 오소록이동네, 별드르, 별진밭, 새가름, 동가름 등 너무도 정겨운 우리말 명칭들. 이 가름들을 둘러싼 새미소오름, 붉은오름, 누운오름, 정물오름, 정물알오름, 도너리오름, 문도지오름, 선소오름. 이러한 자연이 제공하는 풍요로운 공간 속에서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던 순박한 사람들에게 4·3은 거대한 재앙으로 다가왔다. 300여 호의 가옥이 없어지고, 152명의 주민이 학살되거나 행방불명됐다. 사라진 집들은 잃어버린 가름들에 있었을 터. 새가름이 사라지고, 동가름도 사라지고, 웃동네도 잃어버렸으며, 오소록이동네도 사라졌으며, 중가름도 사라졌다.

1949년 봄부터 금악 주민들은 명월 상동인 고림동에 임시로 살다가 1953년 7월이 지나서야 돌아와 벵듸가름과 뒷논, 돗밭동네를 중심으로 마을을 재건했다. 금악오름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크고 작은 가름들이 예닐곱 개나 있던 이 섬의 서부 중산간지역 대촌이 4·3 광풍에 피해를 입어 옛 모습이 사라진 안타까움. 마을 어르신께 이런 질문을 했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재건해서 살면 됐을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 "사람이 다 죽었는데 누가 하나?" 그랬다. 잃어버린 마을의 의미는 잃어버린 사람들이 그 마을의 주인이었다는 것.

지금 금악리 주민들이 총궐기해 반대투쟁을 하고 있는 두 가지 현안이 더욱 마음을 암울하게 한다. 마을 중심부에 육가공공장이 들어오겠다는 것과 폐기물처리시설이 이 귀중한 자연자원 마을 속에 들어오겠다는 것에 반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마을 곳곳에 반대 현수막들이 걸려 있어서 금악리 주민들의 심정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함축적으로 상징하는 현수막 문구가 가슴 저미게 한다.

"옛날에는 4·3으로 금악리민 다 죽이더니 이제는 페기물로 금악리민 다 죽일 거냐?”

누군가에겐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이 되는 사업이지만 누군가에겐 죽고 사는 문제라고 하는 사실을 금악리 마을공동체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잿더미에서 어떻게 일으켜 세운 마을인데 다시 잃을 수는 없다는 절박함을 금악리의 역사를 알면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안관홍 이장에게 금악리의 자긍심을 물었다. 대뜸 '결속력'이라고 했다. 출향인사들을 포함한 금악리민들에게는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질긴 정서가 유전자처럼 흐르고 있다고 한다. 이 제주어 한 마디에 함축된 금악리의 혼. "경해여도 금악사름 아니가게!" 견해 차이를 가지고 내부적으로는 다투다가도 금악리 이름이 걸린 사안에 대해서는 자신의 주장과 고집을 접고 크게 하나 되는 모습.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의 그러한 문화풍토 속에서 자랐으니 당연히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금악리 공동체정신. 비근한 예로 심하게 다퉈서 말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이지만 그 상대방의 자식에게 경사가 생기면 찾아가 축하해준다고 한다. 이유는 간명하다. 고마우니까. 금악리 사람이라는 것에 자긍심을 줬으니까 원수 같은 사이지만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으로, 고맙다고 하는 문화는 마을공동체라는 아름다운 공간이 아니고서는 맛 볼 수 있는 진한 삶의 향기라고 해야겠다.

오직 환경을, 금악리 9개의 오름과 넓은 목장지, 숱한 습지 공간이라는 환경을 지켜낼 수 있다면 아픈 역사를 딛고 일어난 금악리의 미래는 밝다. 자동차 생활이 보편화 된 상황에서 사통팔달의 교통요지가 되는 위치적 강점은 어떠한 마을 사업을 하더라도 성공 가능성을 담보하고 있으므로. <시각예술가>

논동네길의 여름날 오후
<수채화 79cm×35cm>

마을 안 길을 돌아다니다가. 정겨운 모습을 발견하고 스케치에 들어갔다. 남북으로 난 길에 서쪽 집이 그림자로 팔을 뻗어 동쪽 집 담장을 만지며 안부를 묻는다. 아침 햇살에는 그림자가 반대로 아침 인사를 했을 것이라는 즐거운 추측과 함께. 이웃의 정을 집 그림자도 알고 있으리라는 다소 과장된 상상이 그림을 그리게 하는 동기가 되곤 한다. T자 형 길가 모서리 돌담이 너무도 자연스럽다. 구멍이 많이 난 다공질 현무암. 화산지형의 표면을 흐르던 돌들이 많다는 증거다. 기포작용이 활발하게 일어날 수 있는 여건이었으니까. 쌓은 느낌 또한 자연스럽다.

작위적인 어떤 정질도 하지 않고 있는 돌들을 그냥 생긴 그대로 골라가며 얹어 놓은 모습이 무위자연의 심성을 드러낸 듯 하고. 직각 모서리를 절묘하게 처리한 능력이 일품이다. 전체적인 풍광은 여러 세대가 공존하는 집들의 역사성을 보여준다.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슬레이트를 덮던 1970년대 새마을운동 시절의 집부터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집까지. 낡으면 정겹고 새로운 것은 변화하고 있는 마을의 모습을 보여줘서 좋다. 집과 집 사이 공간에 숨은 듯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트렉터가 오래된 집과 대조를 이루며 금악리의 오늘을 보여주는 것 같다. 옛날에는 소나 말이 하던 일을 저 친구가 하고 있으니까. 창고로 보이는 건물 양철지붕을 트렉터 바퀴와 돌로 눌러서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한 모습은 그리는 내내 미소가 일어나게 했다. 바람의 섬 제주가 저 지붕 위에 있으니까.



먹구름 이겨낸 눈부신 벵듸못
<수채화 79cm×35cm>

거센 남서풍이 몰고 온 먹구름이 금악리를 덮었다. 바람이 없는 평소에는 금오름이 반영되어 야릇한 인상을 주는 900평 너른 벵듸못 표면이 작은 물결로 살랑거린다. 구름 그림자 짙게 드리운 저 오름은 지금 직면한 금악리 주민들의 심정을 그대로 상징하는 듯해 그렸다. 오름과 습지, 목가적인 자연환경 모두가 귀중한 생존권 영역임에도 금전적 이익을 위해 금악리를 이용하려는 자들에 의해 유린당하게 생겼으니 그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여름날, 강풍에 흘러가는 두꺼운 구름들 사이로 잠시 잠깐 쏟아지는 뙤약볕이 어두운 그림자에 쌓인 주변과 엄청난 명도대비를 이루면서 강렬한 반사광을 뿜어내는 것이다. 금오름 아래 경작지까지 태양광선이 비추는 영역이다.

그 뒤로는 그림자에 가둬져 있고. 먹구름에 무게감을 강조한 것은 지금 금악리를 짓누르고 있는 그 존재에 대한 표현으로 생각하였다. 과장이기에 앞서 극명한 현실 직시다. 어떤 난관과 시련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일궈온 금악리 마을공동체를 향해 미력한 그림으로나마 공감대와 연대의식을 드러내고 싶은 열망이 그리는 내내 함께했다.

광학적으로 그림은 명암의 산물로 보이지만 현실 속에서는 형태와 존재의 생성물이다. 빛과 어둠은 만질 수 없지만 마을은 어느 곳이든 만질 수 있다. 나뭇잎 하나도 소중한 존재라고 하는 의식에서 금악리를 바라보자. 금악리의 귀한 가치를 지켜내기 위한 노력을 결코 현실방어가 아니다. 더 큰 미래를 향한 눈부신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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