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을 겪은 후 빈곤에 허덕이던 1950년대 후반에 조성된 하원수로길. 논을 만들어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원마을 주민들의 삶의 지혜와 추억이 깃든 생태문화 탐방로이다. 양영태 작가
민족의 얼과 아픔 동시에 간직한 길계곡엔 가을꽃이 고개 내밀며 반겨식량문제 해결 위한 수로길도 볼 만
태풍이 지나간 숲길은 어수선하다. 바람에 맞서 힘을 다했지만 끝내 지키지 못한 잎들이 찢긴 채 바닥에 가득하다. 귀퉁이에는 황칠나무 잎 한 무더기가 검게 멍들어 떨고 있다. 찢긴 채 가지에 매달려있는 잎 뒤에서 숨어 있던 바람이 속삭인다. 괜찮아. 금방 일어설 수 있어. 바람이 못마땅한 숲은 서로 가지를 어루만지며 태풍의 아픈 상처를 쓰다듬고 있다. 계곡을 넘어 상록활엽수가 가득한 숲길로 접어든다. 숲은 우리에게도 따스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 고생했다고. 여름의 열기로 지친 몸을 자연의 품속에서 식힌다.
지난 11일에 진행된 한라일보의 '2022년 제주섬 글로벌 에코투어' 8차 행사는 무오법정사 주차장을 출발하며 시작했다. 고지천을 넘어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를 지나 한라산둘레길 동백길을 거쳐 궁산천 계곡을 따라 북쪽으로 올랐다.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언물을 거쳐 하원수로길을 따라 남쪽으로 쭉 내려와 출발지로 돌아오는 코스다. 단순하게 보이는 코스지만 가을이 시작되는 숲길과 계곡의 풍광을 만끽하며 편하게 즐길 수 있는 투어다.
법정사 주차장을 출발해 고지천 계곡을 넘으면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가 있다.
수정난풀
끈적끈끈이버섯
호자덩굴
지금은 축대 등 건물 흔적만 있지만, 3·1운동보다 먼저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한 항일운동의 발상지이다. 잠시 서서 그날의 함성에 귀 기울인다. 그곳을 지나 북쪽으로 이어진 숲길을 따라 조금 오르면 한라산둘레길과 만난다. 동백길로 이름 붙여진 길은 무오법정사에서 돈내코 탐방로까지 이어진다. 둘레길은 동백나무 군락지를 지난다. 나이 어린 동백나무가 많이 있는 지역이다. 길을 가다 길잡이 박태석 씨가 길옆 갈색의 마른 나뭇잎 무더기를 스틱으로 가리킨다. 무엇인가 하고 한참을 본 후에야 개구리 한 마리가 보호색을 하고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말을 걸어도 미동도 없다. 동백나무숲을 지나면 궁산천을 만난다. 온통 바위로 된 건천을 지나서 한라산 방향으로 틀어 계곡 옆길로 접어들었다. 숲은 서어나무와 단풍나무 등 낙엽활엽수와 동백나무와 굴거리나무 등 상록활엽수가 빽빽이 들어차 있다. 바위 위에 자리 잡은 키 큰 소나무 한그루는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길게 누워서 지내고 있다. 그래도 꿋꿋하다.
구름송편버섯
며느리밥풀
숲길은 조릿대가 가득 덮고 있고 간간이 요즘 한창인 수정난풀도 보인다. 엽록소가 없어 식물체가 하얀데 빛을 받으면 더욱 광채를 띤다. 여름철 하얀 꽃을 피웠던 호자덩굴은 어느새 빨간 열매를 달고 있다. 늦게 핀 사철란 꽃에는 피곤함이 묻어있다. 계곡을 내려 잠시 쉬어간다. 숲에서는 보이지 않던 꽃들이 보인다. 바위떡풀이 바위에 붙어있다. 며느리밥풀은 하얀 밥풀을 떼어 낸 붉은 입술을 내밀고 있다. 미역취가 꽃을 드러내면 가을이 온 것이다.
양영태 제주여행작가
궁산천 계곡을 넘어 언물을 향한다. 언물은 물통이 깨끗하고 파이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도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 자료를 찾을 수는 없지만 언물은 찬물의 제주어가 아닐까. 언물 주변에는 물이 흐르는 지류들이 여럿 있다. 산에 비가 많이 내린 후라 꽤 많은 양의 물이 흐르고 있다. 언물을 지나 고지천을 건너면 버섯건조장 터가 있다. 집은 허물어지고 트럭은 쓰레기를 가득 실은 채 잠들어 있다. 마당 가운데 벚나무는 여전히 잎을 내고 단풍이 들고, 상사화는 열매가 커간다. 버섯건조장을 지나면 하원수로길과 만난다.
하원수로길은 하원마을에 논을 만들어 주민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었다. 1950년대 후반기는 한국전쟁을 겪은 후 빈곤에 허덕이던 시절이었다. 먹을 것도 변변치 않던 시절이었다. 논을 만들어 그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영실 물과 언물을 하원 저수지로 보내기 위해 수로를 만든 것이다. 한라산 영실 등반로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등산코스로도 많이 이용했던 길이기도 하다. 수로길을 따라 내려오면 법정사에 닿는다. 양영태 제주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