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에서부터 이 마을에 대한 배경이 나타난다. 중국에서 제주에 혈맥을 끊으러 온 호종단이라는 자가 임무를 마치고 배를 타고 돌아가려 하는 것을 한라산 산신령이 분노해 막았다는 의미에서 차귀(遮歸). 가장 오래 전 마을 명칭이 차귀다. 고작 명의 제후국 조선이 차귀진을 설치한 이후 두모리에서 한 가닥이 갈려나와 신두모리라고 부르다가 1861년에는 당산봉 밑에 있다고 해 당산리로 개명했다가, 1892년 수월봉의 옛 이름이 고산(高山)에서 연유해 고산리가 됐다고 한다. 마을 이름의 원천이 된 수월봉에 올라 사방을 보면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을 받는다. 바다에 신비하게 떠있는 섬들을 조감도처럼 위에서 내려 볼 수 있다는 것이 절묘한 기쁨을 선물한다. 차귀도(천연기념물 제422호), 와도, 죽도에서부터 동쪽에 당산봉, 멀리 대정지역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시선의 향연을 만끽하게 된다. 제주 최고의 자연전망대라는 찬사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좋은 것, 소중한 것들을 욕심스럽게(?) 모두 가지고 있는 마을이다.
화성이라는 별에 살면 화성인, 지구에 살면 지구인이 되는 것처럼 제주에 살면 제주인이라고 했을 경우에 이 곳 보다 먼저 제주인이 살았던 근거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기원전 1만년 ~ 6천년으로 파악하고 있는 고산리 선사유적지(사적 412호)가지고 있는 의미는 학술적 관점은 물론 관광자원으로써의 가치 또한 무궁무진하다. 출토된 유물의 분포 범위가 무려 15만㎡. 출토된 유물은 석기가 9만9천여점, 토기가 천 여점이다. 장기간에 걸쳐서 많은 인구가 살았던 지역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고산리 선사유적은 시베리아, 연해주, 만주, 일본, 한반도 일대를 포함하는 동북아의 신석기 초기 연구에 가장 중요한 지역이라고 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귀한 자원을 가지고 마을주민들과 함께 관광자원으로 발전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체험과 설명을 듣는 건물공간이 있지만 지역주민들과 괴리돼 운영하고 있으니 발전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수월봉이 지닌 가치는 실로 어마어마한 자원이다. 화산섬 제주가 보유하고 있는 다양한 지질자원 중에 퇴적과 융기를 설명하면서 지질학적 시간성을 현장에서 확인 할 수 있는 곳. 단순하게 경관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지적 만족도까지 얻을 수 있는 자산을 보유한 마을이다.
그래도 마을 주민들이 보유한 가장 중요한 자산은 농경지다. 제주의 리 단위에서 950.6㏊ 면적의 농경지를 보유한 마을이 있을까? 1500여명의 주민을 행복이라는 영역으로 인도하는 농업의 터전. 그런 이유에서일까. 이성삼 이장에게 고산1리의 가장 큰 자긍심을 묻자 "흙의 힘"이라고 했다. 조상 대대로 농사를 주업으로 삼고 살아온 것, 상대적으로 다른 마을들에 비해 풍족한 소출을 얻을 수 있다는 우월감이기도 하다. 다른 마을들은 밭과 밭 사이에 담을 쌓아 경계를 설정하는데 고산리 평야지대엔 두렁들로 이뤄져 있다. 돌이 귀한 밭? 옛날 보리 수확철에 보리짚을 쌓아 큰 낟가리를 만들 때,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줄을 위로 넘겨서 돌을 매달아야 하는데 주변에 돌이 없어서 밭으로 출발할 때 달구지에 실어서 가야했다. 어떤 토질의 땅인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다.
천혜의 땅, 뜻 그대로 하늘이 베풀어주지 않으면 이러한 모든 풍요로운 여건을 얻을 수 없을 것 같은 마을이다. 문제는 이 귀중한 자원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더 큰 가치를 만들어야 함에도 현실은 지속적인 안타까움으로 점철돼 있다. 마을공동체의 역량을 행정이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분야별로 큰 담장을 쌓아서 그 부분만을 생각하고 다른 영역과 결합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것은 아닐까? 구슬에 구멍을 내서 꿰어야 보배라고 했는데, 구슬에 구멍을 꿰는 것은 위법한 행위처럼 인식하고 있는 고착화된 사고방식을 가지고서는 고산1리라고 하는 귀중한 보배를 세계무대에 진출시킬 수 없을 것이다. 수 억 년의 지질시간 여행과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건너가는 시기의 선사인들을 만나러 갈 수 있으며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삶의 진한 맛을 관광자원화 할 수 있는 마을. '시간여행지 고산1리'를 찾으면 인간의 삶이 얼마나 짧은 기간 잠시 스쳐지나가는 존재인지, 겸허함을 얻을 수 있다. <시각예술가>
당산봉 아래 저녁풍경<수채화 79cm×35cm>
당산봉에 가려서 일몰을 볼 수 없으되 더욱 아름다운 저녁을 맞이할 수 있는 곳. 산의 실루엣과 대비된 노을이 더욱 큰 신비감을 보여준다. 하늘빛의 변화는 땅의 색을 어떻게 변화시키는 지 그리고 싶었다. 또한 농촌마을 밭과 집들을 품은 어머니처럼 포근하다. 안온함이 감도는 자태 아래 하루를 보낸 일상들이 밤을 맞이해 쉴 준비를 하고 있다. 성급한 가로등이 먼저 들어오고 뒤이어 슬레이트집 한쪽 방에 형광등불이 밝혀졌다. 밭에서 돌아온 모양이다. 방금 전까지 화면 근경 밭에서 일하다 들어간 할머니가 형광등 스위치를 킨 모양이다. 평화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냥 이렇게 보여질 뿐. 수채화의 특성을 살리려 하였다. 광선을 그려낸다는 것은 깊이를 의미하기도 한다. 단순한 원근법을 가지고 설명 할 수 없는 전체적인 조화요 작화의 수순에 의해 최종적인 한 점, 전봇대의 저 가로등 빛이다. 저 하얀 불빛을 위해 나머지 면적 모두가 필요했다. 일몰이 가지는 시간성과 가로등이 만난다는 것은 이러한 공간에서 미학적 전율을 선물하게 되는 것. 밤도 아니며 낮도 아닌 그러한 시간은 풍경이라는 일상적인 시각적 환경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풍경 속에 잠재된 에테르를 끄집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저녁, 그것도 황홀한 일몰 광선이 점차적인 페이드아웃 상황에서 낮은 저음들이 연주하는 물상의 소리들을 빛으로 듣는다. 부지런한 농부들이 집으로 들어가 저녁밥상을 마주하는 시간. 집과 밭 사이로 난 굽이돌아가는 길을 걸어들어 갔다.
수월이는 어디에 있나<수채화 79cm×35cm>
그리는 내내 전설 속 수월이를 생각했다. 동생을 구하려다가 절벽에 떨어져 죽었다는 누나 수월이의 이야기를 사람들은 고산이라고 부르던 이름을 대신해 부르기 시작한 모양이다. 얼마나 가슴이 아팠으면 순박한 마을사람들이 그 수월이를 잊지 않기 위해 오름의 이름까지 바꿔 불렀을까? 전설은 전설일 뿐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절절함이 가슴 저민다. 가을날의 수월봉은 풀과 나무가 확연하게 판화적 대비를 보여준다. 그걸 그리려 했다.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지질학적 가치에도 식물들이 옷을 입는다. 질감과 색이 다른 풀과 나무를 천으로 삼아 암반 굴곡들을 덮는 것이다. 기상대와 팔각정은 저 거대한 자연의 예술행위에 구경꾼에 불과하다. 그래서 하늘에 얇은 구름이 낀 날 그렸다. 그래야 기상대의 흰색 구의 형태가 하늘과 버무려져 존재감에 타격을 줄 테니까. 누렇게 변해가는 급경사에서 절벽으로 흐르는 흐름을 오직 작은 나무들에 의지해 표현하는 것은 매력적이면서도 단순화된 구성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다. 수채화의 특성에는 겹쳐져 밑에 은은하게 깔리는 기법이 있거니와 외부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여려 겹을 바르고 또 바르며 흐르는 기운을 투입시켰다. 어떤 두께를 묘사가 아니라 자체의 느낌으로 형상화 시킨다는 것은 화법의 방식을 떠나 수월봉과 같은 자연적인 상황에서 도전해볼 만한 일이다. 잘게 쪼개진 것을 큰 흐름 속에서 묶어내는 일이 그림 속에서는 가능하다. 제주의 서쪽 끝, 맑은 날이면 늘 수평선 일몰을 감상하는 수월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