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를 배우며 도움이 필요한 곳에 손을 내밀고 있는 이경애 씨. 김지은기자
[한라일보] 불행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스무 살이던 해, 잠에서 깨자마자 삶이 뒤틀렸다. 들어본 적도 없는 병, '안면 마비'였다. "자기 전까진 멀쩡했는데 일어나 보니 마비가 와 있었어요. 정말 심했을 땐 친구가 앞에 있어도 "야" 하고 발음하지 못할 정도였죠. 한창 예쁠 나이에 그 일을 겪게 되니 공부를 할 생각도 못했죠." 이경애(55) 씨가 말했다.
갑자기 얼굴이 달라지니 고생이 심했다. 매일 같이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는 게 일상이 됐다. 그렇게 2년쯤 됐을 때 멈추기로 했다. 그는 "하루에 한 번 침을 맞다 보니 나중엔 침만 봐도 덜덜 떨렸다"며 "(처음보단 상태가 나아져) 이 정도 되니 그만뒀다"고 했다.
온전히 아픈 데만 집중하던 시간이었다. 엄마 아빠에게 "나는 왜 이래야 되냐"며 원망도 했다. 그래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해 주는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고, 1남 1녀를 낳았다. 누구보다 밝게 키우려 애썼다.
공부하며 마음 치유… 세상에 한 발짝
2014년, 마흔 중반 나이에 대학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던 해였다. "아들은 제주대학교, 저는 방송통신대에 신입생으로 들어갔어요. 1학년 때 엠티를 갔는데 서로 같은 곳으로 간 적도 있지요.(웃음) 늦게 공부를 하며 도움도 많이 받았어요. 아이들은 엄마가 늦은 나이에 공부하는 모습이 좋다고 자랑스러워하기도 했죠."
큰 응원을 받았지만 적응은 쉽지 않았다. 학교에 가서도 누가 쳐다보는 게 싫어 뒷자리를 고집했다. 그는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울 때도 사람들이 많은 곳은 꺼려했다"며 "얼굴 때문에 많이 위축돼 있었다"고 했다.
변화의 계기가 된 것은 '상담'이었다. 청소년교육을 전공하며 개인·집단 상담에 대해 배우다 직접 전문 기관을 찾았다. "상담을 알려면 상담을 받아 봐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혼자 끙끙댈 게 아니라 제 상황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구하기로 했어요. 그게 제가 세상에 한 발 내딛는 징검다리가 된 것 같아요. 전에는 아팠던 걸 숨기고 싶었는데 이제는 누굴 만나도 떳떳이 이야기하죠. '저 이렇게 아팠어요'라고요."
그 역시 도움이 필요한 곳을 살피게 됐다. 2018년 대학을 졸업하고 저소득층 아이들의 멘토링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이듬해부터 '수어'를 배우게 된 이유도 비슷하다.
"수어통역센터에서 일할 직원을 찾는다는 구인 광고를 보게 됐어요. '수화'는 들어봤는데 '수어'는 뭐지라는 궁금증이 생겼죠. 알고 보니 2016년 수어가 제2의 국어로 지정(한국수화언어법 제정)되면서 수화가 수어가 된 것이었죠. 멘토링을 하며 도움이 필요한 곳이 많다는 걸 느끼고 또 어떤 것을 공부하면 좋을까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수어 교육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마침 교육 장소도 집과 가까워 일단 배워보자고 덥석 신청했지요."
이경애 씨는 수어를 알아야 농인들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했다. 사진은 그가 간단한 수어를 하고 있는 모습.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①만나서 ②반갑습니다 ③감사합니다. 김지은기자
제2의 국어 '수어'… "알아야 농인이 보여요"
한 번도 접한 적 없던 수어를 배우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단어 위주로 배우는 기초반을 넘어서니 수업 시간에 등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못 알아듣겠어도 자리를 지켰다.
"국어에도 표준어와 사투리가 있는 것처럼 수어도 마찬가지였어요. 게다가 농인들이 사용하는 '농식'이 따로 있어 '없다'라는 말도 그릇이 비어 없을 때, 사람이 없을 때, 돈이 없을 때처럼 상황에 따라 표현이 달라지더라고요. 지금도 많이 서툴지만 계속 하다 보니 조금씩 수어를 이해할 수 있게 됐죠."
수어를 배운 지 4년이 넘었지만 그는 여전히 공부하고 있다. 요즘도 농아인협회, 농아복지관에서 일주일에 세 번 교육을 받는다. '수어'로 시작했지만 촉수화(시청각장애인을 위한 촉각을 활용한 수어), 점자 등으로 분야를 넓히고 있다. 그는 "공부를 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테지만 시작하고 나니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더라"라며 웃었다.
그는 배우는 데에서 멈추지 않았다. 수어를 배우며 '손소리봉사단' 활동을 하고, 이달부턴 농인의 근로지원인으로 일하고 있다. 그의 바람처럼 수어를 배워 도움이 필요한 곳에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수어로 대화하는 사람을 봐도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수어를 알게 되니 농인들이 보이기 시작했지요. 안 들리고 말을 못할 뿐이지 우리와 뭐든 같이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그가 수어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수어는 제2 국어이지만 학교에서도 접할 기회가 없어요. 다른 나라 언어인 영어가 초등학교 때부터 필수 과목으로 들어가 있는 것과 대조적이죠. 초등학교 때부터 기본 단어만이라도 수어로 익힌다면 커서도 농인과 간단한 소통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농인들도 사회 안에서 비장애인과 좀 더 융화될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의 그를 있게 한 것도 사회를 향한 '한 발짝'이었다. 그 걸음이 모여 20대에 겪었던 아픔에서도 걸어 나올 수 있었다. 그랬던 만큼 지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청년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자꾸 나아가세요. 사회에 발을 내딛어야만 보이고 알게 되는 것들이 있어요. 뭐든 해 보려는 도전 정신도 생기게 되고요. 쉽게 포기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