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35] 2부 한라산-(31)혈망봉(穴望峯)

[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35] 2부 한라산-(31)혈망봉(穴望峯)
혈망봉, ‘바위 봉우리’라는 뜻으로 고구려어에 뿌리
  • 입력 : 2023. 04.04(화) 00:00
  •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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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망봉 첫 기록은 1609년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몰라

한라산 혹은 가장 높은 봉우리를 혈망봉(穴望峯)이라 한다는 얘기를 접하게 된다. 혈망봉이 무슨 뜻인가? 혈망봉에 관한 첫 기록은 제주 판관을 지낸 김치(金緻)의 '유한라산기'다. 이분은 1609년(광해군1) 3월 제주에 와 1610년 9월에 떠났으니 1년 6개월 남짓 제주에 머물렀다. 제주도 도착 후 10여 일 만에 한라산을 등정했다. '역주 탐라지'(푸른역사)를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사진은 깎아지른 듯 우뚝 선 한라산 정상의 석벽.

그는 1609년 4월 8일 제주성을 출발했다. 무수천을 따라 말을 타고 등정했다. 노리오름, 삼장골, 볼레오름을 거쳐 존자암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 영실, 수행굴, 칠성대를 지나 동쪽으로 5리를 가니 석벽이 깎아지른 듯 우뚝서서 기둥처럼 하늘을 떠받쳤다. "이것이 곧 이른바 상봉(上峯)이란다. 여기서 말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고 비틀비틀 밀고 당기며 올라가니 험한 돌길이 구름에 닿아 인적이 통하지 않았다." 이런 기록으로 볼 때 무수천 변을 따라 천백고지를 향해 갔을 것이다. 여기서 노리오름을 지나 존자암으로 갔던 것 같다. 다음날 지금은 폐쇄된 탐방로인 영실 기암의 오른 사면을 따라 오른 것 같다. 칠성대에서 5리를 동쪽으로 갔을 때 석벽이 기둥처럼 서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칠성대에서 노루샘을 거쳐 선작지왓을 통과하고 백록샘 부근에서 남벽까지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말에서 내려 지금은 폐쇄된 남벽을 올랐을 것이다.

"정오에 비로소 정상 위에 닿아 혈망봉을 향하여 대좌하였다. 이 봉우리는 한 구멍이 꿰뚫어 건너 통해 볼 수 있으니 그런 까닭으로 지어진 명칭이다. 사면이 봉우리로 둘러 마치 성곽 속에 연못이 있는 듯, 그 깊이는 한 길 남짓 된다." 남벽 등산로를 통해 정상에 올라 혈망봉을 대좌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 판관은 혈망봉을 오르지도 않았고, 직접 본 적도 없다. '혈망봉(穴望峯)'이라는 봉우리 명칭을 작명한 것은 더욱 아니다. 아마도 남벽 정상 근처에서 높은 봉우리를 향해 앉았다는 것이다. 대좌했다는 것도 마치 온돌방에 부부가 마주 앉은 형국처럼 느껴지지만 이어지는 문장으로 볼 때 멀리 바라다보이는 위치에 앉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조선시대 김치, 조관빈, 이원조의 한라산 등람기에 혈망봉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구멍으로 백록담을 바라볼 수 있다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백록담 인근에서 혈망봉으로 여길 만큼의 구멍은 그동안 발견되지 않았으나 한라산 정상부 동남향 주변에 사람 머리가 들어갈 만큼의 삼각형과 이보다 조금 작은 구멍이 있음이 확인되어 이 책에서는 백록담과 관련해 별도로 서술했다." 2022년 한라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에서 발행한 '한라산의 지명'이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혈망봉이란 '무언가를 바라볼 수 있는 구멍이 있는 봉우리'라거나 '혈(구멍 혹은 명당)을 바라볼 수 있는 봉우리'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인 것 같다. 위의 책은 '혈'은 구멍, '망'은 바라본다는 뜻이라고 단정하고 그 구멍을 찾았다는 내용으로 읽힌다.

겸재 정선의 혈망봉도(서울대박물관 소장).

겸재 정선의 혈망봉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혈망봉, 무언가를 바라볼 수
있는 봉우리일까?


이중 어느 풀이를 보더라도 혈망봉이라는 단어는 조어 형태가 어색하다. '~을 바라보다'를 '~망'으로 쓰는 예가 없다. 오히려 '망견: 먼 곳을 바라봄', '망구순: 아흔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여든한 살을 일컫는 말', '망원: 멀리 바라봄', '망월: 달을 바라봄', '망향: 고향을 그리며 생각함' 같이 '망'이 먼저 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여기서 찾았다는 구멍을 통해 특정한 지형이 보인다거나 어떤 상징 같은 것이 보이는 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한라산 정상 어느 곳에서 구멍 뚫린 바위를 찾았다는 것인데 그 바위가 혈망봉인지를 어떻게 특정할 수 있었는지도 밝히지 않았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혈망봉은 '무언가를 바라볼 수 있는 구멍이 있는 봉우리'라거나 '혈(구멍 혹은 명당)을 볼 수 있는 봉우리'라고 하기에는 어색하다. 우리 역사에 '혈(穴)'은 어떻게 발음했을까?

혈망봉(穴望峯)이라 쓰고
가메봉으로 읽는다

강화도라는 지명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강화라는 지명은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그 유래를 확인할 수 있다. 혈구군일운갑비고차(穴口郡一云甲比古次)라는 내용이 있다. '혈구군은 갑비고차라고도 한다'라는 뜻이다. 이 문장의 구조는 혈(穴)은 갑비(甲比)에 대응하고 구(口)는 고차(古次)에 대응한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전문가)

또 다른 내용도 있다. 혈성본갑홀(穴城本甲忽)이다. '혈성은 이전에 갑홀이었다'라는 뜻이다. 혈(穴)은 갑(甲)에 대응하고 있다. 앞에서는 혈과 갑비가 대응했는데 여기서는 비가 사라지고 갑만 나오는 것이 다르다.

또 '해구군은 이전 고구려의 혈구군으로 바다 가운데 있으며 경덕왕이 이름을 바꾼 것으로 지금의 강화현'이라는 내용도 나온다. 핵심은 고구려 때 혈구(穴口)라 했는데 어떤 변화를 거쳐 지금은 강화라 한다는 것이다. 혈구라는 지명은 처음에는 갑비고차라 했고, 그 후에는 갑곶이라 했다. 여기서 갑은 강으로, 곶은 화(華) 즉, 꽃으로 표기하면서 지금의 강화가 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혈(穴)은 고구려어로 갑이다. 이 갑에 망(望)이 합쳐진 것이 혈망(穴望)이다. 여기서 망(望)은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망이라 발음했다.

그러므로 혈망은 '갑망'이었을 것이다. 이 말은 어두 음만 취하면 '가마'가 된다. 이두에서 이런 방식의 표기를 '음가자'라고 한다. 혈망봉이라 쓰고 가마봉이라고 읽으라는 취지다. 혈망봉이란 결국, 가메를 나타낸 것이고, '바위 봉우리'의 뜻으로 쓴 것이다. 금강산에도 혈망봉이 있다. 역시 '바위 봉우리'다.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구멍 뚫린 바위를 표현한 작품은 없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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