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얼마 전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하트 시그널' 시즌4를 멍하니 보다가 참가자들이 서로의 사랑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정신이 번뜩 들었다. 누군가는 사랑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했고 다른 이는 사랑은 '상대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남성 출연자는 사랑은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종종 들어온 사랑의 정의였지만 그 남성 출연자가 여러 명의 여성 출연자들을 애태우고 있는 상황이어서 그랬을까 나는 그가 좀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랑은 나만 좋은 사랑인 거잖아. 나 좋자고만 하는 사랑은 좀 이기적인 거 같아.' 그러다 문득 사랑에 있어서 이기적과 이타적이라는 것을 구분하고 정의하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생각이 들었다. 나와 타인 사이를 전류처럼 물결처럼 흐르는, 잡을 수도 없고 측량할 수도 없는 그 사랑이 과연 나와 상대 사이 분리할 수 있는 상태 혹은 감정일지 궁금해졌다.
마츠나가 다이시 감독의 영화 '에고이스트'는 한 남자의 사랑이 변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퀴어 로맨스로 시작한 영화는 두 남자 사이에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하면서 중반부 이후 다른 방향의 사랑 이야기로 전환된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고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또래들의 폭력을 견뎌온 남자 료스케는 성인이 된 지금은 도쿄의 유명 패션지 편집장으로 화려한 삶을 살아간다. 소소한 게이 라이프를 함께 보내는 친구들이 있고 갑옷처럼 두르고 다니는 명품 패션들이 그의 매일을 휘감고 있다. 일견 근사해 보이는 싱글 라이프로 보이지만 아직 그에게는 사랑이 채워주지 못한 매일의 일부가 남아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퍼스널 트레이너로 일하는 류타를 만난다. 다정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연하의 청년에게 마음을 뺏긴 료헤이는 류타와의 관계를 빠르게 진전시킨다. 사랑의 온도가 뜨거워지고 사랑의 농도가 짙어질 무렵 료헤이는 류타의 비밀을 알게 된다.
'에고이스트'는 자극적 일정도로 또렷한 성애적 욕망을 감각적으로 그려낸 전반부와 한 인간의 깊은 외로움과 연민이 빚어낸 사랑의 스펙트럼을 차분히 담아낸 후반부가 큰 대조를 이루는 영화다. 사랑 빼고는 모든 것이 완벽했던 한 남자가 각기 다른 종류의 사랑을 차례로 맞닥뜨리며 변화해 가는 성장 영화이기도 하다. 자신의 삶을 누구보다 잘 가꾸던 료스케는 료타를 만나 자신의 삶 안에 그를 받아들이고 료타의 삶 안으로 주저 없이 뛰어든다. 그리고 료타의 자리가 비워진 뒤에도 료타의 삶 안에 머무른다. 연애는 끝났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끝나지 않는다. 료스케가 료타의 홀 어머니를 돌보기 시작하면서 '에고이스트'는 사랑의 다른 모양을 탐색해 가는 료스케의 변화를 담아낸다.
료스케의 어떤 사랑은 강렬한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었고 또 다른 사랑은 연민이라는 의문의 호기심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둘 모두 사랑이었지만 사랑에 서툰 료스케는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납득하기 어려워한다. 료타가 떠난 자리에 머무르며 료타의 어머니를 돌보던 료스케가 자조하듯 묻는다. '저는 사랑이 뭔지 모르겠어요'라고. 그러자 료타의 어머니는 웃으며 료스케에게 답한다. '너는 몰라도 돼. 우리가 사랑이라고 생각하니까.'
이렇게 사랑이 변했다. 연인에게 마음을 쏟은 자리에 무언가가 자라났고 생명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을 사랑의 감정이 료스케와 료타의 어머니를 감쌌다. '에고이스트'는 농밀한 타액처럼, 축축한 눈물처럼 연인 사이를 흐르던 사랑이라는 액체가 기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관객들은 어느덧 공기처럼 누군가의 어깨 위로 내려앉는 데워진 온도와 습도를 느끼게 된다. '에고이스트'의 장면들은 어떤 것도 사랑일 수 있고 사랑의 모양은 아무도 그려낼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료스케와 료타 그리고 료타 어머니의 행동은 각각 바라보기에 따라 이기적일 수 있겠다. 소유하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사랑이라는 감정의 도움을 이용했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진실과 진심 사이에 놓였던 의문들이 안개처럼 느껴질 때 그 모든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감정은 불확실해서 더욱 확실한 사랑일 것이다. 나는 '에고이스트'를 보며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는 물음에 대한 답 하나를 얻은 것 같았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