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소설(가작)] 상구와 상순-윤호준

[2024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소설(가작)] 상구와 상순-윤호준
  • 입력 : 2024. 01.02(화) 00:00  수정 : 2024. 01. 02(화) 20:55
  • 오은지 기자 ejo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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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정지란 작가

역시 사람 손에 비할 순 없구나.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 후로도 슈퍼맨을 찾는
사람은 노부부뿐이었다. 다른 환자들은 계속 김상구만 찾았다.




[한라일보] 마을 주민들은 김상구의 손을 좋아했다. 황무지처럼 거친 바닥에 마디마다 옹이가 박힌 손. 영험한 기운이 감도는 큰 손이었다. 육신을 갉아먹던 아귀를 일소하고 비로소 평화를 찾는 사람들. 탈진한 채 힘들게 걸어 나간 후 이틀 뒤 다시 찾아와 평생 앓던 통증이 사라졌다며 만세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약손 중의 약손! 그 손에 몸을 맡기면 오랜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환상이 주민들의 무의식을 지배했다.

제주도 성천포에서 천하장사 김상구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실제로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천하장사를 꿈꾸는 씨름선수였고, 체격도 씨름선수 못지않게 장대했다. 그가 성천포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서른 되던 해, 군대 제대 후 뒤늦게 대학을 졸업하고 자전거로 제주도를 일주하면서부터였다. 일주일 동안 자전거에 몸을 싣고 제주도 곳곳을 누비고 다니던, 15년 전 젊었을 때 얘기다.

낮에는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서 바다와 오름을 쫓아다녔고, 밤에는 아름다운 섬에 정착하여 살 수 없을까? 그 방안을 강구하며 시간을 보냈다. 여행이 끝날 무렵, 그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제주도 시골 마을의 인구는 적지만, 노인들은 많았다. 바람 부는 마을의 노인들은 작업복 바람으로 부지런히 땀을 흘리다가 건강하게 살다 죽는 바람을 갖고 있었고, 그 바람에 마을에 있는 병원엔 언제나 환자들이 북적거렸다. 관광 도시의 명성에 걸맞게 도로 곳곳에 조성된 꽃밭은 공공 근로에 동원된 노인들 덕분이다. 온종일 양팔을 치켜들고 로봇처럼 감귤을 따는 일이나 5㎏ 남짓한 납덩이를 허리춤에 매달고 물속에 들어가 20㎏ 넘는 소라를 짊어지고 나오는 일은 젊은 사람에게도 벅찬 작업이다. 가만있으면 몸이 쑤시고 일하면 더 쑤시는 사람들. 격한 노동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종교의 신도들 같았다. 이들을 보고 육지에서 의사들이 입도하여 시골 마을에 개원하였고, 전국 각지의 물리치료사를 제주도로 불러들였다.

병원 원장들은 환자들의 대기 시간을 줄이기 위해 지압하는 물리치료사를 경쟁적으로 고용했으며 타 병원보다 긴 시간 동안 지압하도록 물리치료사들을 압박했다. 어버이날에는 원장이 직접 노인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줄 정도로 환자 유치에 공을 들였다. 병원의 원장은 의사이지만, 병원의 매출을 좌우하는 주인공은 바로 물리치료사였다. 물리치료사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김상구는 제주도야말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곳이고, 또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지역이라고 확신했다. 다른 건 몰라도 지압 하나만은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었다.

일주일간의 순례를 마치고 육지로 귀환한 김상구는 여자 친구 이상순에게 보따리를 풀어놓으며 제주도행을 제안했다. 백화점이 없는 곳이어서 다소 답답할 수 있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백화점 따위는 없어도 돼. 그런데 내 몸값도 높게 쳐 줄까?"

김상구의 대학 물리치료학과 후배이기도 한 이상순은 복잡한 서울에서 쥐꼬리 같은 물리치료사 월급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었기에 김상구의 말이 솔깃하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고 제주도 시골 마을 성천포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김상구가 성천포에서 스타 물리치료사로 명성을 떨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타고난 손과 쉽게 지치지 않는 체력, 게다가 그에게는 옆에서 함께 일하는 이상순이 있었다. 김상구와 달리 이상순은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하는 물리치료사였다. 환자의 아픈 부위에 핫팩을 대고 전기치료기 패드를 올려주는 일이 그녀의 역할이었는데, 통증 급소를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감각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미리 표시해 놓은 지점을 김상구가 주물러 주면 환자들은 하나같이 감탄했다. 그녀는 특히 스포츠의학에 밝아서 인기가 높았다. 잘못된 의학 지식이 들판의 잡초처럼 번지는 환경. 허리디스크가 있는데도 요가나 윗몸일으키기를 고집하고, 종아리 근육이 땅긴다면서도 하루에 천 번 넘게 발꿈치 드는 운동에 집착하는 사람들, 운동은 운동으로 풀어야 한다는 해괴망측한 논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이상순은 그들을 세심하게 관리했다. 잘못된 자세와 생활 습관, 운동 방식을 바로잡아 병을 예방했고, 병의 진행을 막았다.

15년 동안 두 사람은 성천포의 조그만 의원에서 물리치료사로 환상의 콤비를 이루며 함께 근무했고,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아 키웠다. 남부럽지 않은 삶이었다.

*

만 65세 이상이면 본인 부담 진료비가 1700원. 핫팩과 전기치료에 10분 남짓 지압까지 받고 나면 전혀 아깝지 않은 비용이다. 환자들은 동트기 무섭게 성천의원으로 달려와 김상구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린다. 그에게 지압 받는 목적으로 내원하지만, 지압 순번이 돌아올 때까지 핫팩과 전기치료기 패드를 달고 베드에 누워서 기다려야 한다. 슈퍼맨이 처음 물리치료실에 등장했을 때도 사람들은 김상구만 바라보았지 슈퍼맨에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숱하게 보아온 안마 기계라고 생각했다.

소형 냉장고만 한 네모난 몸통에 슈퍼맨 로고를 새겨넣은 마사지 로봇. 김상구와 슈퍼맨 중 하나를 선택해서 지압 받을 수 있다고 이상순이 설명했을 때 환자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비록 한 푼을 쓰더라도 더 나은 서비스를 받으려는 게 사람들의 심리. 그러자면 기다리는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다수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키를 돌려야 하는 법. 환자들은 슈퍼맨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했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슈퍼맨은 환자를 만날 수 있었다. 최근 마을 골목에 식당을 오픈한 노부부였다. 김밥과 콩나물국밥을 주로 파는 가게였다. 3월 중순인데도 갈색 털모자를 커플 모자처럼 쓰고 있는 모습이 금실이 좋아 보였다.

"슈퍼맨에게 지압 받으시면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다."

접수 직원의 설명을 듣고 이상순에게 다가간 두 사람은 슈퍼맨을 사이에 두고 양쪽 베드에 엎드렸다. 남자는 무릎 뒤쪽 오금이 당긴다고 했고, 여자는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이상순은 슈퍼맨의 몸통에 달린 팔 두 개를 당겨서 남자의 햄스트링 근육에 올려놓았다. 반대쪽 몸통에 달린 팔 두 개는 여자의 허리 쪽으로 움직였다. 곧이어 나지막한 기계음을 내며 팔에 달린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 손과 흡사하게 손바닥도 있었고, 김상구에 비해 짧았지만 손가락도 다섯 개였다. 살색보다 황금색에 가까웠으며 실리콘으로 만들어 감촉이 부드러웠다. 손가락 스무 개가 남자와 여자의 몸을 경쾌하게 주물렀다. 이상순은 지압 강도를 조금씩 올려보았다. 여자 허리를 지압하는 손은 3으로, 남자 햄스트링 근육 위의 손은 5까지. 기계음도 덩달아 커졌으나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노부부의 반응을 살피고 싶었는데, 엎드리고 있어서 표정 변화를 읽기 힘들었다. 이상순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베드에 누워서 슈퍼맨의 황금손을 흘깃거리는 환자와 눈이 마주칠 땐 편안한 미소를 보냈다.

10분가량 지난 뒤 이상순은 시술 부위를 바꿨다. 평소 오른쪽 어깨가 아프다는 남자의 극상근과 삼각근으로 황금손을 옮겼다. 왼쪽 무릎 통증을 앓는 여자는 똑바로 눕혔다. 왼쪽 허벅지 부위를 촉진하면서 굵은 띠를 찾았고, 그 위에 황금손 두 개를 올렸다. 대퇴사두근에 문제가 생기면 연골이 멀쩡한 젊은 사람도 무릎에 통증을 느낀다. 연골 주사를 맞아도 효과를 보지 못한다. 뭉쳐서 굵은 띠를 형성한 근육을 풀어줘야만 통증을 해결할 수 있다. 이상순은 슈퍼맨의 다이얼을 돌려 지압 강도를 4로 올렸다. 손가락 열 개가 여자의 허벅지 위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듯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순간 여자의 얼굴에서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눈을 감고 입을 조금 벌린 채 얕은 신음을 내뱉는 모습. 이상순은 여자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강도를 5까지 올렸다. 여자는 이제 신음을 내뱉지 않았다. 아래턱에 힘을 꾹 주면서 애써 신음을 참고 있었다. 손가락의 움직임에 맞춰 눈 주변 근육이 미세하게 꿈틀거렸고, 콧구멍에서는 따스한 콧숨이 가느다랗게 흘러나왔다. 불그스레하게 홍조까지 띤 그 얼굴엔 희열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대박!

이상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한번 슈퍼맨을 찬찬히 살폈다. 제아무리 비싼 안마기라도 마사지에 한계가 있다. 두드림과 주무름. 둘 다 동그란 볼을 움직여서 지압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슈퍼맨은 달랐다. 사람 손과 비슷하게 생긴 황금손은 사람처럼 손가락 다섯 개를 직접 움직였다. 때로는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눌러주기도 했다. 사람보다 훨씬 힘이 셌고, 아무리 오랫동안 작동해도 지치지 않는 지구력을 지녔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약손 중의 약손. 슈퍼맨은 낯선 만큼 경이로워 보였다.

"좀 어떠신가요?"

시술이 끝난 뒤 이상순은 노부부의 반응을 확인해 보았다.

"고맙습니다."

예전에 김상구에게 지압 받은 후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고, 식당에서 직접 김밥을 말아와 김상구와 이상순 앞에 내놓기도 했다. 그런데 슈퍼맨에 대해서는 의례적인 감사의 말을 전달할 뿐이었다. 심상하다 못해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베드에 누워 관심 있게 노부부의 후기를 살피던 사람들은 이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사람 손에 비할 순 없구나.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 후로도 슈퍼맨을 찾는 사람은 노부부뿐이었다. 다른 환자들은 계속 김상구만 찾았다.

*

성천의원에는 70세 이상 노인들이 많이 내원한다. 거동이 불편하여 자녀나 요양보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물리치료실에 들어오는 환자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움직이지 못하거나 정신 줄을 놓게 되면 알아서들 요양원에 들어가야지."

교장선생님은 70대 노인이면서 같은 노인들을 아무렇지 않게 비난했다. 노모를 등에 업고 물리치료실에 들어오는 갈치왕 사장을 한심한 듯 바라보더니 당뇨가 심해 눈이 먼 아버지를 부축하고 다니는 물회왕국 사장에게는 혀를 끌끌 찼다. 치매에 걸린 노모를 업고 다니는 돼지삼형제 사장 앞에선 물리치료실에 누워있는 사람들이 모두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키고 눈먼 자식이 효자 노릇 한다지만, 부모들이 진정 원하는 건 자식들이 바쁘게 일하는 모습이야!"

육지에서 중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재직하다 정년퇴직하고 홀로 제주도에 내려와 생활하는 그는 날이 갈수록 입이 도끼날같이 날카로워졌다. 제주도 이주민들은 혼자 잘난 체할망정 도민들 눈치를 보기 마련인데, 그는 태연자약하게 타인을 깔아뭉갰다. 자식 자랑은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 큰아들은 대검 특수부 검사 출신으로 현재 대형 로펌에서 변호사로 근무하고, 둘째 아들은 서울에 있는 대학 병원의 교수라고 한다.

"김 부장. 요즘 어떻게 지내나. 별일 없나?"

그는 가끔 물리치료실 베드에 누워 큰 소리로 큰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곤 하는데, 아들을 항상 김 부장이라고 호칭하면서 '장'을 길게 뒤로 뺀다. '장'에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쟝'으로 들렸다. 특별하게 보이고 싶어 허세를 일삼는 그를 보면서 마을 주민들은 그저 타고난 천성이 그러려니 생각하며 무시하고 지나갔다.

교장선생님이 오후에 물리치료실에 나타나 시간 없다며 김상구에게 지압만 먼저 받고 가겠다고 사정했을 때 이상순은 정중히 거절했다. 핫팩과 전기치료를 받지 않더라도 지압 받으려면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만약, 내원한 순서를 어기고 김상구의 베드에 먼저 눕히게 되면 그간 유지되어온 평화가 한순간에 깨지게 된다. 교장선생님은 안된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떼를 쓰며 진상을 부리다가 부루퉁한 얼굴로 슈퍼맨 옆에 놓인 베드에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이상순은 그의 양쪽 대퇴사두근 위에 황금손을 올리고 지압 강도를 5로 맞추었다. 잠시 후 교장선생님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신음을 내뱉었다. 강도를 6으로 높이자 탄성을 질렀다. 5분가량 지난 뒤 일어나 앉아 어깨와 목에 지압을 요구했다. 이상순은 그의 왼쪽 귓바퀴 아래쪽, 목에 붙은 근육을 세심히 촉진했다. 얇은 띠가 손가락에 들어왔다. 목덜미가 뻐근하고 두통이 있거나, 목 주변 근육이 뭉쳐있거나, 날개뼈가 아프거나, 손가락이 저려서 병원을 방문하는 사람들. 이들 중 상당수는 목덜미를 타고 내려오는 사각근이 뭉쳐있다. 뭉친 사각근이 신경을 눌러 발생하는 증상이다. 이상순은 뭉쳐서 띠를 형성한 사각근과 극상근 위에 황금손을 올렸다.

"이렇게 시원할 수가. 사람 손과는 비교가 안 돼."

교장선생님은 커다란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며 자지러졌다. 마치 산삼을 발견한 사람처럼 열광하는 모습이었다. 사람 손과는 비교가 안 된다는, 고삐 풀린 억양이 유독 김상구의 귓속을 반복적으로 후볐다.

"김 선생에게만 받지 말고 슈퍼맨에게도 한번 받아 보세요. 받아 보면 알 거외다."

궁색한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김상구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삼촌들. 슈퍼맨에게도 한 번 받아 보세요. 덕분에 나도 조금 쉬어 봅시다."

사람들은 교장선생님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새치기해서 지압 받으려는 의도가 무산되자 그에 반발하여 김상구를 할퀴려는, 강퍅한 늙은이의 유치한 몽니라고 생각했다.

"에이. 제아무리 슈퍼맨이라도 기계가 사람 손맛만 하겠어."

베드에 누워 핫팩을 대고 있던 농기계 수리 달인이 눈을 흘겼다.

"직접 한번 받아 보라니까! 내가 거짓말하는 사람으로 보여!"

교장선생님은 버럭 언성을 높이며 이상순에게 작동 중지를 요청했다. 공연히 흥분해 눈을 부라리고 삿대질까지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 봐. 목이 돌아가고 팔이 올라가잖아."

그는 목과 팔을 움직이며 달인이 누워있는 베드 쪽으로 다가갔다.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까 저쪽으로 가서 직접 한번 받아 보라구."

심통과 오기가 가득 뻗친 얼굴로 달인의 팔을 잡고 흔들더니 기어코 그를 일으켜 세웠다. 사람들은 억지춘향이처럼 끌려가 슈퍼맨의 황금손에 양쪽 어깨를 맡기는 달인의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10분가량 지압을 받은 뒤 달인은 침대에서 내려와 팔을 돌리면서 스트레칭했다. 제법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고철 덩어리인 줄 알았는데, 맹탕은 아니군."

곧이어 해녀의 밥상 사장이 이상순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허리를 삐끗해서 불편하다며 시간 없으니 지압만 부탁한다고 말하면서 베드에 엎드렸다. 이상순은 그녀의 허리를 촉진한 뒤 왼쪽 흉추 요추 접합부 부위와 요방형근에 황금손을 올렸다. 지압 강도를 서서히 높이면서 황금손을 작동시켰다. 잠시 후 베드에서 내려온 그녀는 허리를 좌우로 돌렸다.

"좀 어떠세요?"

"아직 잘 모르겠어. 아까보다 좀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고마워."

해녀의 밥상 사장이 물리치료실을 빠져나간 직후부터 슈퍼맨을 사이에 둔 베드 두 개에 사람들이 슬며시 다가와 드러눕기 시작했다.





슈퍼맨 옆에 눕기 위해 기다리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햇볕이 실내에서 완전히 물러날 무렵 김상구의 베드 위엔
아무도 누워있지 않았다. 불 없는 화로처럼 허전했다.



삽화=정지란 작가



황금 손가락 스무 개가 기민하게 움직이는 소리와 반사적이고 무의식적인 신음이 한데 어우러져 실내를 부유하고 있었다. 슈퍼맨 옆에 눕기 위해 기다리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햇볕이 실내에서 완전히 물러날 무렵 김상구의 베드 위엔 아무도 누워있지 않았다. 불 없는 화로처럼 허전했다.

김밥집 노부부가 물리치료실에 들어왔을 때 김상구는 책상에 앉아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맥없이 먼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김상구에게 다가가 무릎과 어깨가 아프다고 말했다.

*

진료를 마치고 김상구와 이상순은 곧바로 귀가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 장소를 모색하다가 노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김밥 잘 마는 방법. 입구에 적힌 간판이 독특했다.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간판보다 식당 이름이 좀 생뚱맞았다. 테이블 서너 개가 붙어있는 조그만 식당에 손님은 없었다. 주방 앞에 키오스크가 눈에 띄었다.

"일하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는데, 이런 기계가 왜 필요하지?"

김상구는 애꿎은 기계에 화풀이하고 있었다. 그런 김상구를 노부부는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식당에서도 여전히 커플 털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이 신혼부부 같았다. 김상구와 이상순은 키오스크 앞에 서서 콩나물국밥 두 개와 김밥, 그리고 막걸리 한 병을 입력하고 카드를 기계에 밀어 넣었다.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서 막걸리를 잔에 따랐다. 김상구가 입술을 축이면서 노부부 쪽을 힐끔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잔뜩 담긴 눈빛이었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남자였다. 백발에 중후한 얼굴이 주방일보다 넥타이가 더 어울려 보였다. 행동도 굼떴고, 김밥을 마는 손도 느릿느릿 움직였다. 여자는 옆에서 이를 지켜보며 콩나물국밥의 육수를 점검했다. 마치 제자에게 조리법을 전수하는 스승 같았다.

"교장선생님 만난 지가 3년쯤 되었는데, 사람이 갈수록 이상해지는 것 같아. 부쩍 화도 잘 내고, 하는 행동도 유치해. 어린아이처럼 퇴행하는 것 같아. "

위로한답시고 이상순이 말문을 열었는데 오히려 그 말이 김상구를 더 자극했다.

"슈퍼맨이 지압을 잘했겠지. 효과 없는데 그렇게 떠벌리겠어. 당신도 사람들이 시원해하는 걸 보고 좋아했잖아."

불퉁거리는 말투에 심지가 박혀있었다. 건드리면 곧바로 터질 듯한 기세였다.

"나이를 먹는다고 강퍅해지는 건 아니야. 대부분 늙으면 유약해져. 내가 보기에 교장선생님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 아마 젊었을 땐 더 까칠했을걸."

이상순은 장단을 맞추기 위해 다소 과장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을 남자가 가져왔다. 콩나물국밥의 시원한 육수도 그렇지만 국밥에 담긴 잘 익은 김치와 꼬들꼬들 씹히는 오징어 토막이 일품이었다. 김밥 속 재료들은 화단에 심어놓은 꽃처럼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밥과 잘 어울렸다. 국밥을 끓이고 김밥을 마는 사람은 남자였지만, 김치를 담아서 삭히고 오징어를 데치고 김밥 속 재료를 준비한 것은 남자의 솜씨라고 보기 어려웠다. 음식을 먹는 동안 손과 입은 분주하게 움직이는데, 오고 가는 대화는 없었다. 두 사람은 마임을 연기하는 연기자 같았다. 주방에 나란히 앉아 쑥덕대는 노부부와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국밥과 막걸리 한 병을 깨끗이 비우고 나서야 이상순이 노부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장님. 고향이 어디 신가요?"

오랫동안 인천에서 살다가 6개월 전에 제주도로 이주하였다고 여자가 설명했다.

"삼촌들. 솔직하게 한번 말씀해 보세요. 슈퍼맨에게 지압 받아 본 소감이 어떻습니까?"

이번엔 김상구가 질문했고, 또다시 여자가 대답했다.

"기다리지 않아서 좋긴 했는데, 김 선생님 손맛과 비교할 수 있겠어요? 사람 손처럼 만들어 놓았지만, 기계라서 그런지 딱딱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강도 조절을 못 하면 다칠 수도 있겠더군요."

"그런데 왜 사람들이 슈퍼맨에게 몰리죠?"

김상구가 다시 질문하자 이번엔 남자가 대답했다.

"그야 신기하니까 한 번 받아 보려는 거겠죠."

노부부는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

자전거에 몸을 싣고 제주도를 일주한 지 어언 15년, 바로 엊그제 일 같다. 실로 오랜만에 자전거에 올라탔는데, 바퀴가 잘 굴러가지 않는다. 한 시간밖에 타지 않았음에도 허벅지 근육이 뻐근하다. 그동안 뱃살은 말할 수 없이 불거졌고 다리 근육은 앙상하게 줄어들어 내일 아침 일어나면 무릎이 아플 것이다. 김상구는 자전거를 해수욕장 부근에 세워 두고 모래사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반짝이는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숭어들. 봄바람을 만끽하려는 건가. 갈매기는 떼를 지어 모래사장을 점령하고 있었다. 김상구가 다가가도 움직이지 않더니 부딪히기 일보 직전에야 마지못한 듯 자리를 내주고 날아갔다.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슈퍼맨이 등장한 후 두 달 동안 김상구는 매일 굴욕을 씹으며 살아야 했다. 김밥집 노부부의 견해와 달리 환자들은 슈퍼맨에게 지압 받기 위해 순번을 기다렸다. 교장선생님처럼 노골적으로 슈퍼맨을 찬양하는 사람은 드물었으나 너도나도 슈퍼맨을 찾았다. 처음엔 다소 멋쩍은 얼굴로 김상구의 눈치를 살폈는데 그것도 잠시, 곧 슈퍼맨 쪽에 줄 서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김상구를 찾는 환자들도 더러 있었지만, 슈퍼맨에게 가고 싶은데 기다릴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주로 누웠다.

이상순도 슈퍼맨에게 지압을 받아 보았다. 허리와 어깨를 받은 뒤 김상구보다 힘은 강했으나 강약 조절이 떨어진다고 평가했다. 김상구는 자신의 양쪽 허벅지 근육에 슈퍼맨의 황금손을 올려놓고 강도를 서서히 높여가면서 지압을 받았다. 지압하면서 환자들의 반응에 따라 위치와 강도를 세밀하게 조절해야 하고, 그 반응은 그들의 입을 통해 파악하는 게 아니라 지압하는 사람의 손으로 느끼는 법인데, 이상순이 슈퍼맨 옆에 아무리 오래 붙어있어도 정확하게 이를 조절하기는 불가능할 것. 김상구는 그렇게 설명하면서, 시원하긴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일시적이며 과장된 현상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슈퍼맨에 대한 평가는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도 수학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는, 다분히 주관적인 영역이었다. 이미 한번 형성된 팬덤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지압을 받은 사람들은 새로운 미담을 토해내기에 바빴고, 미담이 쌓이면서 또 하나의 우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김상구가 이상순보다 두 배가량 월급을 많이 받고 있지만, 병원의 매출을 올리는 건 김상구가 아니라 이상순과 슈퍼맨이었다. 김상구는 슈퍼맨의 보조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압보다는 환자들에게 핫팩을 올려주거나 전기치료기의 패드를 붙여주며 시간을 때웠다. 성천의원은 더 이상 김상구와 같이 지압 잘하는 물리치료사가 필요하지 않았다.

슈퍼맨은 팔 네 개에 달린 손 네 개를 이용해 동시에 두 사람을 지압한다. 혼자서 거뜬히 하루 60명 넘게 지압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물리치료사 한 명이 물리치료하고 진료비를 보험공단에 청구할 수 있는 환자 수는 하루 30명. 김상구가 없다면, 슈퍼맨이 지압한 환자들의 진료비를 보험공단에 청구할 수 없다. 그러나 김상구를 내보내고 젊은 물리치료사를 고용하는 길이 훨씬 합리적일 터. 슈퍼맨을 한 대 더 들여놓아 인건비는 줄이면서 환자 수를 늘리는 게 효율적인 병원 운영 방향일 것이다. 성천포가 고향인 여자 원장은 오랫동안 김상구와 함께 일해 왔던 인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을 뿐, 예정된 미래를 바꾸진 않을 것이다.

15년 동안 온몸으로 노인들의 아픈 곳을 주물러 왔는데, 그동안의 시간이 모래알처럼 우르르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한낱 안마 기계에 밀려난 모습이 상갓집 똥개와 다를 바 없다. 김상구는 노인들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이상순을 볼 때면 서운한 감정에 사로잡혀 간간이 눈물을 찔끔거렸다.

김상구가 슈퍼맨에 밀려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이상순은 슈퍼맨 옆에서 눈을 치켜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슈퍼맨에게 지압 받은 환자들이 고맙다고 고개 숙일 땐 흐뭇한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모습이 마치 그녀가 지압한 주인공 같았다. 김 선생님. 달인 삼촌 빨리 핫팩 올려주세요. 김상구에게 명령을 내리는 건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중학교 1학년 딸과 초등학교 5학년 아들에게 들어가야 할 돈이 앞으로 태산이다. 김상구가 해고당하면 향후 생계가 막막해진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이상순은 불평 한마디 없이 온종일 슈퍼맨 옆에 달라붙어서 땀을 흘린다.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자존심 때문에 편하게 꺼내기도 힘들다. 지나치게 마음이 복잡했던 탓일까? 급기야 낙상 사고까지 발생하고 말았다.

겉으론 멀쩡해 보이지만, 돼지삼형제 사장의 노모는 치매를 앓는 중이다. 낙상 사고는 김상구가 그녀에게 전기치료를 끝낸 뒤 발생했다. 베드에 걸터앉은 노모가 신발을 신으려는데, 베드 아래 구석진 곳으로 신발이 들어가 있었다. 김상구가 그것을 가져오기 위해 몸을 숙였을 때 그녀는 베드에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종합 병원에서 CT를 찍은 결과 엉치뼈가 골절되었다는 진단이 나왔고, 한 달간 입원한 뒤 이제 막 퇴원한 참이다. 간병비 포함해서 지급해야 할 총진료비가 700만 원. 병원에서 발생한 낙상 사고였기에 병원에서 책임을 져야 했다. 다행히 원장이 의료배상 공제 조합에 가입한 상태였으므로 200만 원이 넘는 배상액은 공제 조합에서 지급하게 된다. 문제는 병원에서 지급해야 하는 200만 원이었다. 원장은 환자 측에도 책임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100만 원씩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돼지삼형제 사장이 위자료까지 포함해서 민사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오는 마당에 원장의 주장은 일을 더욱 꼬이게 할 뿐이었다. 하지만,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모른 채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누가 뭐래도 낙상 사고의 가장 큰 책임은 김상구에게 있었다. 자신의 잘못으로 병원에 피해를 줬다고 생각하면 속이 쓰릴 따름이다. 명색이 천하장사 김상구가 아니던가….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돼지삼형제 사장을 만나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 것만이 추락한 자존심을 회복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상대를 설득하는 재주가 없는 김상구에겐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무작정 파리처럼 손바닥을 비빈다고 상대방이 100만 원이라는 큰돈을 내놓진 않을 것이다.

멀리서 말 달리는 소리가 들려와 김상구는 고개를 돌렸다. 모래사장 끄트머리에서 말 세 마리가 나타나 점점 가깝게 달려오고 있었다. 말을 피해 갈매기들이 날아올랐다. 영화 속 장면처럼 멋진 풍광이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말의 기세는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부딪히면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김상구는 몸을 움츠리며 스쳐 지나가는 말과 기수를 일별했다. 모자와 선글라스를 쓴 기수의 얼굴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으나 말의 얼굴은 정확히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무지하게 성질 있는 인상. 교장선생님을 보는 것 같았다. 모래사장 끝까지 달려간 말이 잠시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재차 달려오기 시작했다. 김상구는 재빨리 몸을 피했다. 모래사장을 빠져나오면서 가슴 속에 숨겨놓은 중지를 치켜들었다. 속으로 크게 고함도 질렀다. 알량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서민들의 안녕을 짓밟는 인간들. 엿 먹어라!

김상구는 다시 자전거에 몸을 싣고 달렸다. 마을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돼지삼형제에 도착했을 때 이상순이 미리 와 있었다. 브레이크 타임이어서 넓은 식당 홀이 텅 비어 썰렁했다. 맛집으로 유명하여 주민들뿐만 아니라 관광객까지 줄을 잇는 식당이었다. 흑돼지를 숙성시킨 뒤 사장이 직접 구워주었는데, 육즙이 풍부한 비결은 바로 가위질에 있다고 한다.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김상구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 선생님에게 충분히 얘기 들었습니다. 저희 어머니에게도 잘못이 있는 만큼 저희 쪽에서 100만 원을 부담하겠습니다."

사장은 기대 이상으로 화통하고 시원시원했다. 일이 너무 쉽게 풀려 이상할 정도였다. 김상구는 오금이 간질간질했다.

"주변에서 민사소송하라고 부추기는 사람도 있었는데, 저희 어머니에게 잘 해 주신 걸 생각하면 그럴 수 있나요."

육즙처럼 진한 감동이 계속 이어졌다. 슈퍼맨에 밀려나 소멸할 운명에 처한 현실. 김상구는 그런 현실이 서러워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성천포는 아직까지 인지상정이 통하는구나! 그동안 헛산 것만은 아니구나 싶어 가슴이 뿌듯했다.

"앞으로도 자주 저의 어머니를 모시고 갈 테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상구는 허리를 굽히며 사장이 내미는 손을 잡았다. 김상구 못지않게 거친 손이었다.

*

병원에 의료사고가 재발한 것은 그로부터 3일이 지난 뒤였다. 사고를 당한 주인공은 교장선생님이었고, 범인은 바로 슈퍼맨이었다.

교장선생님이 베드에 누워 지압 받고 있다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 앉았을 때 이상순이 재빨리 슈퍼맨의 작동을 중지시키지 않았다면 끔찍한 상황이 펼쳐졌을 사고였다. 교장선생님의 오른쪽 허벅지를 주무르던 황금손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가운뎃손가락의 실리콘이 찢어져 골격 역할을 하던 강철이 밖으로 튀어나왔고, 허벅지 살갗을 할퀴고 말았다. 부드러운 약손이 날카로운 악의 손으로 돌변한 순간이었다. 김상구와 이상순은 교장선생님을 부축하여 원장에게 데려갔다.

"아프셨겠네요. 봉합할 정도는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며칠 치료하면 금세 나을 겁니다."

원장은 상처를 소독하고 그 위에 메디폼을 붙였다. 교장선생님은 묵묵히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이상순과 원장을 몰아붙이고도 남을 사람인데. 의료사고에 대한 병원 책임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도 할 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온화하게 미소 짓는 모습이 인자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색하면서도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새로 오신 양호선생님이신가? 일은 할 만합니까?"

흰 가운을 입은 여자 원장이 예전에 함께 근무하던 양호선생님과 닮아서 농담을 던지는 건가? 김상구와 이상순은 그렇게 생각하며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그러나 원장은 달랐다. 교장선생님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그의 눈을 응시하며 질문했다.

"어르신. 다른 데 또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교장선생님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답을 기다리는 원장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고, 입술을 씰룩거리더니 대답 대신 요령부득한 소리를 입안에서 웅얼댔다.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닌 모습이었다.

처치를 끝낸 원장은 접수 직원에게 교장선생님의 보호자를 찾아 연락하라고 지시했다. 큰 병원으로 전원시켜 정밀하게 검사해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성천포에서 홀로 생활하는 교장선생님의 보호자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명함 받았다고 하던데."

눈이 어두운 부친을 부축하고 다니는 물회왕국 사장이 병원 로비에 앉아 티브이를 보다가 손을 들고 접수 직원에게 소리쳤다. 교장선생님이 돼지삼형제를 찾아가 민사소송하라고 부추기면서 변호사인 큰아들 명함을 주고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는 직접 돼지삼형제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사장은 아직 명함을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병원을 나서자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귤꽃 향기가 빗속에 섞여 하얗게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김상구와 이상순은 봄비와 귤꽃 향기엔 막걸리가 어울린다는 견해를 주고받으며 노부부의 식당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동안 콩나물국밥과 김밥을 품평하면서 여자 사장의 손맛이 특별하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식당 앞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 喪. A4 용지의 흰 여백이 황량하게 느껴질 정도로 작게 쓰인 손글씨였다. 멍한 표정으로 잠시 서 있다가 맞은편 식당으로 무작정 들어갔다. 고기 국수 두 개와 돔베고기와 막걸리를 주문했다.

"누가 상을 당한 걸까?"

김상구가 혼잣말하며 잔을 들이켰다.

"글쎄. 최근까지 두 분 모두 건강해 보였는데."

국수를 입에 넣으며 이상순이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 혹시 황금손의 실리콘을 일부러 찢어놓은 거 아니야?"

"미쳤어! 이 남자가 큰일 날 소릴 하고 있네."

이상순이 발끈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상구는 싱글싱글 웃으며 덧붙였다.

"아무래도 일부러 그랬던 것 같은데. 슈퍼맨을 몰아내기 위해."

"이 남자야. 그런다고 슈퍼맨이 쫓겨나겠어! 만약 쫓겨나면 그다음엔 아이언맨이 들어올 거야. 슈퍼맨보다 업그레이드된 아이언맨."

"그렇겠지."

"놈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야 놈을 제압할 수 있어."

두 사람의 잔이 짠,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이상순이 잔을 비우고 돔베고기 한 점을 집으며 말했다.

"한 말 또 하고 또 해서 이상하다 했더니. 아들이 바빠서 내려올 수 있으려나…."

김상구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맞은편 노부부의 식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상순도 덩달아 식당 간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묵연한 시선의 끝자락에서 두 사람 중 누군가 손을 들고 막걸리 한 병을 더 주문했다. 어쩌면 동시에 그랬을 수도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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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1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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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다화 2024.07.01 (16:52:41)삭제
제주의 일상이... 작가의 일상이... 한 눈에 보이는 글이네요 살아본 자 만이 느낄수 있는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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