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계획을 세우는 일은 미래를 그려보는 일이다.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려는 이 곡진한 시도들이 우리의 삶을 채우고 있다.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는 삶의 흐름에서 그렇게 우리는 닥쳐오는 파도를 타려고 하고 밀려오는 바람을 막아 보려고 한다. 무엇이 다가올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준비된 자에게는 그 맞닥뜨림이 덜 힘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그렇게 무수한 계획들이 세워지곤 한다. 세우는 동안에는 무너지는 일을 생각할 수가 없다. 아니 생각하지 않는 쪽이 마음이 편하다. 그런데 철저한 계획들이 꼭 완벽한 성공으로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영화 '범죄의 여왕'으로 데뷔한 이요섭 감독의 신작 '설계자'는 살인 사고를 조작하는 이들의 이야기다. 매일 예기치 못하게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는 누군가를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이끌기도 한다. 우연이 가져온 지독한 불행인 사고사와 우연으로 가장하려는 치밀함으로 계획된 살인 사이에 존재하는 이들이 바로 '설계자'다. 타인의 죽음을 계획하는 일에 감정이 섞이는 것은 무척이나 곤란한 일이다. 설계자들은 그저 묵묵히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두뇌를 가동시키고 합을 맞춘다. 오차 없는 살인은 가능할 수 있겠지만 동요 없이 살인에 가담하며 살아가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한 임무다. 설계하고 실행할 수는 있지만 스스로의 감정 까지를 책임질 수는 없는 일에 몸 담고 있는 이들은 여러 번, 여러모로 위태로워 보인다. 아귀가 맞는 범행이 지속될수록 차갑게 굳어가는 인물들의 얼굴에서는 핏기도 쾌감도 볼 수가 없다. 나와 남을 죽여가며 사는 일이 어찌 평화롭고 기쁠 수 있을까.
무수한 감정들을 누른 채로 이 설계자들을 진두지휘 하는 영일(강동원)은 이들 중에서도 가장 목석처럼 보인다. 피도 눈물도 없어야 할 수 있는 일을 직업으로 택한 그는 마치 통제 강박에 놓인 사람 같다. 그의 계획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치밀하게 수립되고 대체적으로 예상한 결과로 수렴된다. 하지만 계획에 없던 마음들이 그의 안에서 꿈틀거린다. 영일이 그토록 알고 싶었던 진실이, 마침내 마주하게 된 사실이 모두 그의 안에서 자라온 넝쿨임을 알게 되는 순간 공든 탑은 순식간에 폐허가 된다.
계획이 틀어지는 순간들은 늘 마음이 동하지 않을 때 찾아왔다.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지 못하고 주저했던 순간의 조각들은 여지없이 다시 찾아와 나를 할퀴곤 한다. 후회와 실패를 감각하는 일을 주저한 이들에게 늘 그 감각은 공포일 수밖에 없지만 경험한 이들에게는 다르다. 제대로 꺼내서 용감 없이 내놓아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나는 '설계자'의 엔딩에 이르러서야 영일이 꺼내든 감정의 덩어리들을 보고 마음이 조금 놓였다. 계획은 실패했고 사고는 벌어졌지만 그 실패의 틈에서 마주친 것이야 말로 계획할 수 없던 그의 온전한 마음이었음이 선명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것은 꺼내어 보여주고 싶은 자신의 마음 단지 그 하나가 아니었을까.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