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문화로 거리를 바꾸자 - 이중섭·솔동산거리 진단과 전망] (5)이야기가 있는 공간 어디에

[사람과 문화로 거리를 바꾸자 - 이중섭·솔동산거리 진단과 전망] (5)이야기가 있는 공간 어디에
미술관 빈자리 딛고 다양한 얼굴 보여줄 장소 많아져야
  • 입력 : 2024. 07.11(목) 01: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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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건물 서귀포관광극장의 발견
생활밀착형 문화 공간으로 성장
향유자 넘어 창작자 이끄는 통로




[한라일보] 지난 7일 오후 서귀포시 이중섭거리의 옛 서귀포관광극장. 보슬보슬 장맛비가 내리는 날이었지만 예정대로 '작가의 산책길' 정기 공연이 진행되고 있었다. 생활예술단체인 '우리음악회' 출연진들은 기꺼이 비를 맞았고 객석에 앉은 이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우산을 펴든 채 귀에 익은 노래들을 즐겼다. 독창, 중창, 클라리넷과 기타 연주 등이 잇따랐고 마지막 순서엔 합창이 퍼졌다. 청중들과 함께 부르는 '서귀포를 아시나요'를 끝으로 1시간에 걸친 공연은 막을 내렸다.

이중섭거리에 이중섭미술관만 있었다면 어땠을까. 서귀포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해진 장소가 더 많이 생겨나야 다른 도시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풍경을 빚어낼 수 있을 것이다.

서귀포관광극장에서 '우리음악회' 회원들이 비 날씨 속에 공연을 펼치고 있다.



▶새것 대신 오래된 것 택했더니 명소로 부활=서귀포관광극장은 서귀포시가 서귀읍이던 시기인 1960년 건축됐다. 입구에 세운 게시판에는 영화 상영, 초등학교 학예회, 웅변대회, 대중 가수와 악극단 공연 등 지역 주민들에게 추억의 장소였다는 문구가 적혔다. 오늘날엔 생활밀착형 문화 공간으로 시민들을 문화 향유자를 넘어 창작자로 이끄는 통로가 되고 있다.

화재 등을 겪으며 1999년 폐업한 뒤 오랜 기간 방치되었던 서귀포관광극장은 2012년 마을미술 프로젝트를 계기로 주목받았다. 이후 서귀포시에서 건물 안전 진단과 리모델링을 거쳐 2015년부터 공연장 등으로 개방해 왔다. 올해도 서귀포시의 위탁 관리를 맡은 지역주민협의회에서 기획한 공연들이 주말마다 열리고 있다. 지난 4월부터는 건물 내부에서 문인화 체험이 운영됐다. 다만 냉방이 안 되는 탓에 여름철인 7~8월에는 잠시 문인화 체험을 중단한 뒤 9월부터 재개한다.

쓸모를 잃은 채 이중섭미술관 인근에 흉물처럼 서 있던 서귀포관광극장은 서귀포시가 문화 시설로 활용하면서 새롭게 부활했다. '관광도시 서귀포'로 빠르게 변모하는 동안 옛 서귀포시청사 등 시민들의 기억을 안은 건축유산들이 하나둘 사라진 터여서 서귀포관광극장은 더 빛이 나는 것 같다. 과거의 것을 버리고 새것을 품는 대신에 사연을 간직한 공간의 역사를 붙잡았다.

지붕 없는 폐건물이라는 서귀포관광극장의 약점은 오히려 그만의 개성이 되었다. 이맘때가 되면 무대 뒤편 벽면을 온통 초록으로 뒤덮는 담쟁이는 마치 거대한 설치 작품처럼 다가온다. 서귀포관광극장은 어느덧 이중섭거리의 명소가 되었다.

서귀포시는 서귀포관광극장에 대한 시민과 관광객들의 선호도를 반영해 사유지였던 해당 부지를 사들였고 지난해 12월 소유권 이전을 마쳤다. 현재 들어선 이중섭미술관은 시설 확충 사업에 따라 오는 9월쯤 철거 예정이지만 서귀포관광극장은 그 자리를 계속 지킨다.

서귀포관광극장 전경.



▶10명 중 3명 재방문… 2년 넘는 공백 기간 여파는=이중섭거리에서 솔동산거리까지 남북 방향으로 1㎞ 넘게 뻗은 길에는 이중섭미술관과 함께 이중섭 거주지(1997년 9월 복원), 이중섭미술관 창작스튜디오(2008년 12월 준공) 등 이중섭을 테마로 조성한 공간들이 줄지어 있다. 그중 2002년 11월 전시관으로 개관했고 2004년 9월엔 1종 미술관으로 등록하는 등 매년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중섭미술관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이중섭미술관 시설 확충 기본 계획'(2020년) 자료를 보면 용역진이 미술관 관람객, 정방동주민센터 방문객, 상인 등 19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 응답자의 절반 이상(53.6%)은 미술관을 처음 찾았다고 했다. 반면 2~4회(22.4%), 5회 이상(12.0%)이라는 응답도 34.4%로 10명 중 3명 이상은 미술관을 재방문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중섭미술관 방문 목적으로는 '이중섭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라는 응답 비율이 55.3%로 가장 많았고, 미술관의 좋은 점(중복 응답)으로는 43.4%가 '전시 공간', 24.8%가 '이중섭 거주지'를 각각 택했다. 화가 이중섭, 그와 서귀포의 인연 등 전쟁기에 마주한 가난과 슬픔, 고통 속에 움튼 가족애와 희망을 보고 싶어하기 때문이 아닐까.

서귀포시가 이중섭미술관 신축을 위해 기존 미술관 철거를 예고하면서 주변 상인들 중에는 걱정하는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다. "이중섭미술관 전시 기능 일부를 인근 창작스튜디오로 이전해 임시 가동한다고 해도 지금처럼 관람객들이 올까"라고 말이다. 1년에 많게는 30만 명 가까운 인원이 미술관으로 향하고 이들 중 상당수가 그 일대 상가로 흩어져 지갑을 열어 왔는데 적어도 2027년 재개관까지 2년여 동안엔 그같은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거다.

작가의 산책길 종합안내소 내부.

이중섭거리 서측엔 '작가의 산책길 종합안내소'가 있다. 이는 말 그대로 여행객 등이 정보를 얻기 위해 잠시 들르는 곳이다. 이중섭거리, 솔동산거리로 연결되며 도심을 잇는 작가의 산책길 코스를 한눈에 미리 볼 수 있도록 꾸몄다. 거리가 활성화되고 곳곳의 장소들을 소개할 수 있는 콘텐츠가 쌓일 때 종합안내소도 이름값을 할 것이다. 솔동산거리에 있는 '작가의 산책길 안내소 솔동산 쉼팡'이 최근 문이 잠긴 상황이어서 더 그렇다.

이중섭미술관이 새로 지어지면 또다시 도심 랜드마크로 떠오르겠지만 도시에는 여러 시설, 장소들이 공존한다. 수백억의 예산이 투입되는 이중섭미술관 신축에만 기댈 게 아니라 거리에 있는 오래된 이야기들을 수집해서 꿰야 한다. 이중섭거리 남쪽 솔동산(송산동)만 해도 과거 서귀포의 중심지로 공공 기관, 상업·의료 시설, 숙박·요식업 등이 모여 있었다. 서귀포관광극장과 같은 건축유산의 재발견을 위해 관심을 기울일 때다.

<글·사진=진선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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