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오사카 직항로 개설 100주년 기획/해금(海禁)과 침탈을 넘어, 자주운항의 역사] (6)연재를 마치며

[제주·오사카 직항로 개설 100주년 기획/해금(海禁)과 침탈을 넘어, 자주운항의 역사] (6)연재를 마치며
자주운항운동의 역사 의미… '제주'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 입력 : 2024. 07.30(화) 02: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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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운항의 몰락, 군대환의 독주

[한라일보] 1934년 8월 학술조사 차 오사카에서 군대환을 타고 제주도 산지항에 도착한 지리학자 마쓰다 이치지[田一二]는 제주-오사카 직항로 운항변천사에 대한 자세한 글을 남겼다.

서봉환 사진을 실은 기사 朝鮮新聞 1935년 12월 13일자

"동아통항조합 간부가 오사카에서 좌익운동의 전위(前衛)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섬의 치안상 요주의로 단정, 당국이 1932년 10월 이후 엄중히 단속하고 탄압한 것과 재정 핍박의 궁지에 몰려 1933년 12월 1일부터 운항을 중지했다. 복목환 폐항에 의해 현재(1934년)는 조선우선의 경성환, 아마사키기선회사의 군대환 두 선박이 운임도 8원(1934년 8월 15일까지는 6원)으로 협정하여 출항일도 전자는 6의 날, 후자는 1의 날에, 오사카로부터 교대로 매월 3회씩 취항하고 있다."

1933년 말 기업동맹 순길환, 동아통항조합 복목환의 운항 중지로 인해 오사카 직항로는 일본 회사의 배 경성환과 군대환의 독무대였다. 3원까지 내려갔던 뱃삯은 1934년 8원까지 치솟았다. 1935년 4월에는 조선우선이 제주-오사카 항로에서 철수했다. 아마사키기선과 제휴해 하역업 하청업무를 담당했던 제주상선도 1935년 11월 청산되었다.

오사카직항로를 독점한 제2군대환 전경

제주상선의 역할은 1935년 7월 31일 설립된 소화(昭和)운송주식회사가 떠맡았다. 소화운송은 제주상선의 영업을 인계받고 제주공제회의 재산을 기초로 제주도내 각 면장과 유지가 주주가 되어 창립되었다. 사장 최원순, 전무 이윤희, 박종실 등의 주주가 참여했다. 그러나 이 회사 또한 아마사키기선의 제주총대리점에 불과한 조직이었다. 이제 군대환의 독주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사진 4)



서봉환의 깜짝 도전

일어판 신문인 '朝鮮新聞' 1935년 12월 13일자에는 "제주도-대판간 서봉환(瑞鳳丸) 출현, 1250톤의 우수선, 12월 16일부터 취항"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됐다.(사진 1)

서봉환 취항에 나선 박종실 사진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근래 도항증명의 제한으로 도항자가 격감하여 조우(朝郵)도 수저를 내던져 올봄 폐항 운명에 이르렀다"며, 군대환의 선객 처우가 안좋아 도항자의 불평이 재연되고 있으며 높은 경쟁선이 출현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오사카 축항의 덴마야[天滿屋] 업주와 제주도 유지 박종실(사진 2), 고창현, 이시형, 김태민 등이 알선하여 고베[神戶]의 다츠마[丸辰]해운주식회사를 교섭했다.

결국 12월 16일부터 서봉환(1,250t, 정원 500인)을 취항시키게 되었다. 취항 날은 매월 6, 16, 26일 3회로 정해졌다. 서봉환의 취항에 대해 "제주도민은 오랜 기간 아마사키에 대한 묵은 불만 때문에 본선의 취항을 충심으로 환영 지지하는 형세"라고 했다.

서봉환이 언제까지 취항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중앙일보' 1936년 6월 21일자 기사에 "다츠마기선회사에서 서봉환을 취항시켰으나 도항노동자 저지(도항증명제 실시) 까닭에 사업이 부진하므로 또한 폐항케" 되었다는 기사로 보건대, 반년도 지속되지 못했다.

동아통항조합 해산 후 군대환의 독주를 비판한 기사 1936년 6월 21일자 조선중앙일보

이제 오사카 직항로 개설 13년 만인 1936년에 아마사키기선 군대환의 완벽한 독점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는 운임의 대폭 인상, 제주도민의 심대한 타격이었다. 1936년 5월 21일부로 8원이던 뱃삯이 10원으로 올랐다. 아카사기기선의 전횡에 대해 제주도민들은 속수무책이었다.(사진 3) 1937년 11월 11일 오사카발 군대환은 중일전쟁 발발 후 물가 폭등을 이유로 다시금 12원으로 선임을 인상했다. 돌고 돌아 군대환의 첫 운항 때 가격 12원으로 귀결되었다.



자주운항운동, 역사와 현실

이번 연재를 통해 거칠게나마 1923년 제주-오사카 직항로 개설 이후 제주사람들의 역동적이며 주체적인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동아통항조합의 자주운항운동을 평가한 항일운동가 홍양명의 기고문 1930년 11월 12일자 조선일보

'제주도민-도항자-재일제주인-향토자본가'로 상호 엮어지는 제주 네트워크에 관심을 두었다. 특히 제우사, 제주상선, 제주도기선, 기업동맹, 동아통항조합, 서봉환 취항으로 이어진 제주인들의 자주운항운동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목거리였다.(사진 6)

오사카 축항에 기항한 제2군대환 출처 재일동포역사자료관도록

오사카 직항로에 나선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 제주사람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근면함과 진취적인 기상으로 몸이 새까맣게 되도록 일했다.(사진 5) 이들은 오사카를 중심으로 재일제주인 공동체 사회를 형성했다. 1930년대 이후 한해 7만명 가까운 제주인들이 일본에 거주했다. 이들이 보낸 송금으로 제주도 경제는 활력을 되찾았고, 고향의 근대학교 설립도 이들 덕분이었다. 이들은 일본에서 유행한 근대 사상을 수용해 민족해방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탐라 DNA를 계승한 공동체가 일본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이들은 해방 후 귀환했으나, 4·3으로 밀항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1959년 '북송' 디아스포라 속에서도 자수성가해 고향에 기부하는 향토애를 발휘했다.

연재를 마치며 '제주(濟州)'에 대한 해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해봤다. 과거 중세 때 중앙의 시각에서 바라본 '물 건너 있는 변방 제주'가 아닌, '물 건너온 이들을 수용하는 제주', 출륙금지령을 넘어 바다를 무대로 '나아가는 제주'로 보는 주체적 시각. 고대 독립국 탐라와 현재와 미래 제주가 만나기 위해서 진정 시각의 대전환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한다. 제주항과 강정항으로 초대형 크루즈가 들어오는 제주섬이다. '판제'항로가 아닌 '제판'항로라 하며 제주에서 일본으로 바다 건너 나아간, 스스로 운항을 개척해 나간 선배들의 역사를 되새겨야 할 것이다. 이번 연재를 통해서 독자들과 제주의 미래비전을 이런 관점에서 공유할 수 있었다면 작은 행복이라고 여겨본다.



참고문헌

이번 연재는 새로운 신문기사와 관련 사진이 없었다면 정확한 사실에 다가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연구성과가 큰 도움이 됐다. 신문 연재이다 보니 그 성과들을 하나하나 소개하지 못했다. 대표적인 참고문헌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독자들의 양해를 바란다.

▷김찬정, '이방인은 군대환을 타고', 岩波書店, 1985. ▷김창후, '재일제주인과 동아통항조합운동', '제주도사연구' 4, 1995. ▷츠카사키 마사유키, '오사카-제주도 항로의 경영과 제주도 민족자본', '4·3과 제주역사' 9·10합본, 2010. ▷신재경, '재일제주인 그들은 누구인가', 보고사, 2014. ▷후지나가 다케시, '일제시기 재일조선인 사회의 형성과 단체활동', '역사와 책임' 12, 2023.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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