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3일 '2024 제주섬 글로벌 에코투어' 행사에 함께한 참가자들이 삼나무숲길을 걸어가고 있다. 오승국 시인
4·3 때 많은 주민 피신했던 지역쫓고 쫓기며 생사를 갈랐던 무대낮에 비바람 몰아쳐 선채 점심도
[한라일보] 한대오름, 그 이름처럼 크고 넉넉한 오름이다. 바람 가득하고 늘 물기를 품고 있는 은둔의 오름이자 목동들과 화전민들이 삶의 터전이었던 희망의 대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4·3사건과 토벌 과정에서 한대오름은 고통과 시련의 가득한 산전이었으며,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사라져간 섬사람들의 죽음과 고난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4·3당시 동쪽에 물찻, 말찻, 산란이오름이 최대 피신처라면 서쪽에는 한대오름, 돌오름 지경이 가장 많은 주민들이 피신했던 곳이다.
지난달 13일 진행된 한라일보의 '2024 제주섬 글로벌 에코투어' 행사는 지난 투어에 이어 또다시 우중산행이었다. 출발 당시에는 쾌청한 하늘이었지만 오전 11시쯤 비바람이 몰려왔다. 애초의 트레킹 동선중 색달천변 하산길이 취소되면서 숲길은 더 늘어난 16㎞의 긴 여정이었다. 한대오름 정상부분을 제외하면 대체로 숲길, 오름둘레길, 임도 등 평탄한 길이다. 돌오름과 한대오름은 제주시 애월읍·한림읍·한경면, 서귀포시 안덕면과 중문지역에 걸쳐 널리 펼쳐져 있다.
돌가시나무
피막이풀
안전한 산행을 위해 간단한 몸풀기 운동을 한 후 트레킹의 첫발을 내딛었다. 사전답사를 통해 길을 만드는 등 갖가지 수고를 아끼지 않은 길잡이 박태석씨의 안내로 한라산둘레길인 18임반 돌오름길로 향한다. 작살나무와 산딸나무 꽃이 머리위로 떨어지고, 산수국도 어젯밤 내린비에 젖어 더욱 영롱하다. 맑은 물이 가득찬 색달천을 건넌다. 돌오름 밭을 흐르다 흐르다 천제연폭포를 이루고 중문관광단지 성천포구 바다를 만나 하천의 의무를 다할 것이다.
한대오름을 향해 걷는 중 비가 쏟아진다. 우의를 꺼내 급히 몸을 가리고 다시 걷는다. 잠시 걸었는데 벌써 분화구인 듯 푸른 초지가 나왔다. 한대오름은 높은지대에 위치해 있어 비고는 30m 안팎으로 낮으나 엄청난 품을 가진 대지임을 알 수 있었다. 전 사면에 해송과 삼나무가 주종을 이루며 잡목으로 우거지고, 진달래·꽝꽝나무·청미래덩굴 등이 자라고 있다.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어음리 소길리 유수암리를 품은 신성시 되는 오름이다.
자귀나무
곰취
오름 서쪽지역에는 곰취군락이 있어서 '공초왓'의 지명 유래가 됐다. 4·3 전만 해도 소와 말이 다니던 길을 우리는 걷고 있었다. 그렇다. 한라대지의 길들은 우마의 길, 사람의 길, 일제 강점기 일본군의 길, 4·3 때 피난민과 토벌대의 길의 혼재된 역사의 계곡이었음을. 그치지 않는 비가 야속하지만 한대오름 숲속에서 전투중인 전사들처럼 기립오찬을 했다. 빗물이 도시락에 낙하하지만 아무렇지도 않다. 어차피 먹는다는건 생존의 본능이기도 하니까.
삼나무 숲과 키큰 조릿대를 가로질러 걷다보니 벌써 정상이다. 오래된 부자쌍묘가 한대오름 정상에 솟아 있다. 장전리 박씨의 묘지라고 한다. 장례의 노고에 답하여 그의 후손들은 번성하였으리라. 이곳에서 바라보는 제주 서남부의 오름군락 능선이 아득하고 아름답다.
한대오름에는 땅속에 물기가 스며든 '숭물팟'이 산재해 있다. 그 밭에서 바라보는 삼형제오름과 한라산의 모습도 특별한 아름다움이다. 4·3 당시 애월, 한림지역 주민들에게 피신처이자 해방구였던 한대오름은 1948년 11월, 대토벌로 피바다를 이루었다. 지금도 그 피어린 흔적들은 남아 있다. 오름 서쪽 전설처럼 전해오는 한대비케의 화전마을인 '모른궤', '빌레내', '멍끌' 그 아래 '솔도' 마을들이 다 사라지고 없다. 어도2구 주민들이 100명 이상 숨어들어 피신했던 '지혈궤'와 '한대궤' '동낭궤'와 '흙궤' 한대오름 전투현장이었던 조진내의 대숲 집터 등, 지금도 꺾어진 숟가락과 토벌대의 총탄이 무수히 발견된다.
흰털깔때기버섯
윤노리나무
한대오름을 뒤로 하고 길고 긴 돌오름밭을 지나는 하산길이다. 그 옛날 남제주와 북제주를 나눴던 산전담과 4·3피신처 돌담유적이 나타난다. 가도 가도 끝이없는 삼나무 조림 숲길과 임도의 연속이다. 서귀포시 동광리 주민들이 토벌대에 쫓겨 마지막으로 피신했던 돌오름이 생각난다. 그들의 마지막 죽음의 장소는 정방폭포였던 것이다.
오승국 시인
오늘의 종착지인 남부광역환경관리센터에 다가오자 비가 그쳤다. 보기드문 자귀나무 군락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자귀나무는 낮에 펼쳐졌던 잎이 밤이 되면 합쳐진다 하여 합혼목이라 부르기도 한다. 붉은색이 가미된 자귀꽃이 살랑이며 우리의 마지막 발걸음을 위로해 주었다.
다시 만난 친구여, 가을이 오면 한대오름 단풍구경 함께 갑시다. 다만 오늘은 우리가 걸었던 길에서 사라져간 고운 사람들을 위해 진혼곡 한자락 불러주오.
오승국 시인 <제주작가회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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