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진행된 '2024 제주섬 글로벌 에코투어' 7차 행사에서는 오름과 숲길을 걸으며 찌는 듯한 무더위를 날려 보냈다. 참가자들이 노로오름 능선을 지나 버섯재배장 옛터로 향하고 있다. 오승국 시인
역사의 눈물 서린 제주산하 목도노로오름 능선서 4·3피신처 확인꽃은 흔치 않지만 진한 녹색향기
[한라일보] 내 생애 처음 겪어보는 지독한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팔월 중순, 제주오름의 숲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화사하게 피어났던 봄날의 숱한 꽃들은 자취를 감추고, 푸른 나뭇잎 사이로 씨알이 영글어 간다. 이제 숲은 가을 단풍이란 아름다운 선물을 세상에 보여주고 혹독한 겨울한파를 견딘 후 다시 새해 봄날의 꿈을 시작할 것이다.
우리 민요 가사에 화란춘성 만화방창(花爛春盛 萬化方暢)이란 말이 있다. 우리 인생사의 화려한 봄날은 단 한 번의 청춘시절 처럼 짧지만, 대자연은 매해 꽃이 피고 지고를 순환한다. 청춘의 봄날처럼 '인생의 한창일 때 놀지 않으면 언제 놀겠는가'라는 뜻일 것이다.
지난 10일 진행된 한라일보의 '2024 제주섬 글로벌 에코투어' 7차 행사는 엄청난 무더위였지만 오래간만에 쾌청한 날씨 속에 13㎞의 오름과 숲길을 걸었다. 노로오름과 궷물오름을 제외하면 대체로 숲길, 임도 등 평탄한 길이었다. 우리가 걸었던 노로오름과 궷물오름, 천아숲길 등은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 고성리 지역에 널리 펼쳐져 있다.
칡꽃
두메층층이
출발 장소인 제주한라대 승마장 입구에서 오늘 트레킹의 첫발을 내딛는다. 숲으로 들어섰다. 자연스러운 흙길이어서 편안한 걸음이 계속됐고 예덕, 새덕나무 등 숲이 전하는 위로의 향기는 도시의 끈적끈적한 무더위를 잊게 했다. 서걱서걱 소리내는 산죽(조릿대)을 밟으며 하염없이 숲길을 걸었다.
잘 정비된 임도가 나오고 다시 그길을 걷다 보니 한라산 둘레길 '천아숲길'로 이어진다. 삼나무와 졸참나무, 산딸나무가 어우러져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오래된 삼나무를 감아 올라 꽃을 피운 등수국의 생명력이 놀랍다.
골풀
개곽향
털이슬
천아숲길에서 노로오름으로 향한다. 오전 걸음의 피로 때문인지 노로오름 등정이 힘들게 느껴졌다. 사실 노로오름은 높은 지형에 위치해 있지만 비고는 높지 않다. 드디어 오름 정상에 섰다. 보리수, 철쭉 등 관목류와 오름 남동쪽 사면에 조성된 삼나무가 정상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형제오름 너머 영실 분화구와 한라산이 유려하게 보이고 반대로 서면 한대오름, 돌오름, 산방산, 송악산과 가파도까지 아스라이 보인다. 노로오름은 3개의 분화구가 있으며, 5개의 봉우리로 이어져 족은노로오름과 연결된다. 하나인 듯 두 개의 복합화산체이다.
노로오름, 그 이름처럼 노루(노리)가 뛰놀던 목가적인 오름이었으나, 4·3사건과 토벌의 과정에서 피어린 전투를 치른 항쟁의 오름이었다. 1949년 3월 말쯤,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유재흥 대령)는 적악, 노로악, 한대악을 연하는 선을 차단해 무장대를 포착·섬멸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린다. 2연대 1대대(대대장 임부택)가 이 지역 토벌에 투입됐다. 한대오름에 피신했던 피난민과 무장대는 위쪽에 위치한 노로오름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꽃층층이
산딸나무
한라산과 인접한 최고지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산물내와 장태코 분화구, 주민들의 피신했던 들굽궤와 피신 집터, 무장대의 보초터 등 노로오름 일대에 4·3의 흔적들이 널려 있다. 지금도 농기구 등 생활도구를 비롯해 탄피, 총탄, 소총, 대검, 놋숟가락, 사기그릇, 항아리 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다.
노로오름 둘레 능선을 따라 하산하다 숲속에서 도시락 오찬을 즐겼다. 가파른 숲길을 내려오던 중 4·3돌담피신처를 확인했고, 표고버섯재배장 옛터 건물이 집담만 남은 채 담쟁이와 등수국에 덮혀 있다. 흥망성쇠의 인생처럼 허무하다. 서어, 단풍, 졸참, 쥐똥, 윤노리 나무등이 즐비한 노로오름 앞밭길을 한없이 걷다 보니 꽃 진 나리난초가 영롱한 소녀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오승국 시인
고사리밭을 지나 노꼬메와 족은노꼬메 사잇길을 걸었다. 산수국의 꽃은 지고, 삼나무의 푸르름은 짙어가고 있다. 누린내가 난다하여 기피했던 누리장나무가 팔월 숲속에 홀로 꽃을 피웠다. 누리장 꽃의 아름다움을 이제 알았다. 궷물오름 입구 초원에서 바라보는 삼각 노꼬메가 위엄있게 보였으나 궷물오름 정상의 안내표지석은 초라했다. 그러나 오름 전망소에서 우리가 걸었던 노로오름을 바라보니 아름다운 제주 산하에 감춰진 역사의 눈물을 보았다.
오름 이름의 연유가 된 궤(작은 굴)에서 솟는 궷물은 여전히 맑았으며, 우리는 작은 성취를 마음에 담고 오늘 걸음의 마지막 종을 울렸다.
오승국 시인 <제주작가회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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