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우체통-황지우
[한라일보] 버즘나무 아래
붉은 우체통이
멍하니, 입 벌리고 서 있다
소식이 오지 않는다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사상(思想)이 오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여, 비록 그대가
폐인이 될지라도
그대를 버리지 않겠노라
고 쓴 편지 한 통 없지만,
병원으로 가기 위해
길가에서 안개꽃 한 묶음을 사는데
두 다리가 절단된 사람이
뱃가죽에 타이어 조각을 대고
이쪽으로 기어서 온다
삽화=배수연
그에게 소식이 오지 않는 것은 그가 붙박혀 있지 않고 돌아다니는 형편이기 때문이며, 소식이 있다 해도 그가 기다리는 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길가 붉은 우체통만 "멍하니, 입 벌리고 서 있"는 허망이 뒤에 오는 시구들과 엮여 올 소식이 있을 수 없는, 사상 없는 사람들의 형상을 비유하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면 안개꽃 한 묶음을 들고 찾아가는 병원엔 아마도 사상 때문에 폐인이 된 사람이 병상에 누워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뒤에 오는 시구와 엮여 "두 다리가 절단된 사람이 뱃가죽에 타이어를 대고" 기어 오는 형상을 아프고 아픈 시대의 한 소식으로, 병원으로 향하는 순례자의 떠돎을 자유로움의 거칠고 고독한 한 형식으로 읽을 수 있으리. 기다림이 없는, 잊혔단 생각이 없고 버림 받은 마음이 들지 않는 사랑이란 없다. 그러니, 사랑이여. 사랑이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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