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굴에 관한 고문헌의 기록은 적지 않게 나타난다. 그중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新增東國輿地勝覽’. 제주목 불우조(佛宇條)의 존자암에 관한 내용을 보면, ‘在漢拏山西嶺 其東有石如僧行道狀 諺傳修行洞’이라 하고 있다. 즉 존자암은 한라산 서쪽 기슭에 있는데, 그곳 동굴에 마치 스님이 도를 닦는 모습과 같은 돌이 있어 세상에 수행동(수행굴)이라 전해 졌다는 것이다. 원래 동국여지승람은 조선 성종 12년(1481년)에 편찬한 것을 중종 25년(1530년)에 증보(增補)하고, 신증(新增)이라는 두 글자만 첨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원진목사의 ‘耽羅誌’에는 앞의 기록을 인용하며 원래 존자암은 영실에 있었으나 지금은 서쪽 기슭에서 밖으로 10리쯤 옮겼는데, 대정현 지경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 1601년 한라산을 올랐던 청음 김상헌 목사는 ‘남사록’에 ‘또 수행굴을 지났다. 굴속은 20여명이 들어갈 만하다. 옛날 고승 휴량이 들어가 살던 곳이다. 칠성대(길가에 늘어 선 모습이 마치 북두칠성과 같다)와 좌선암이라는 돌이 하나 있는데, 스님이 앉아 있는 모습과 같아 이렇게 부른다.’고 했다.
다음은 판관 김치가 1609년 한라산 등정 기록으로 ‘영실의 동남쪽 허리에 석굴 하나가 있는데, 수행동이라 한다. 옛날에 도승이 그속에 살았다고 하는데, 부서진 온돌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했다.
또 1702년 등정했던 이형상목사가 ‘남환박물’에 남긴 기록도 있는데, ‘위에 수행동이 있다. 동에는 칠성대가 있어 좌선암이라고 한다. 이는 옛 스님이 말한 팔정 옛 터인데, 이를 존자암이라고 부른다.’고 소개한 뒤 홍유순의 존자암개구유인문을 인용, ‘존자가 암을 짓기는 고량부 삼성이 처음 일어난 때 비로서 이루어졌고, 삼읍이 나뉘어진 뒤에까지 오래도록 전해졌다.···지금은 스님이 없고, 헐린 온돌만 남아 있다’고 했다.
이들 몇몇 기록을 보면 존자암의 연원은 삼성의 출현과 때를 같이 하고, 그 위치는 원래 영실에 있었는데 그 주변에는 칠성대와 좌선암이 있으며, 이 곳을 수행동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옛날 고승 휴량이 도를 닦았던 석굴이 있는데, 곧 수행굴이며, 굴안에는 20여명이 들어 갈만 하며, 지금은 부서진 온돌 자리만 남아 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번에 발견된 석굴은 이런 문헌상의 기록과 칠성대와 좌선암으로 보이는 가까운 주변의 기암괴석, 부서진 온돌자국, 30∼40명은 족히 들어감직한 동굴규모, 그리고 옛 선인들이 한라산을 찾았던 등산로 주변에 위치해 있다는 점 등 수행굴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옛 존자암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종합적인 조사작업이 이루어진다면, 수행굴과 존자암의 관계는 물론 제주 최초의 불교유적과 그 역사에 관한 조명도 새롭게 이루어 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