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봉]그들의 자취
  • 입력 : 2005. 10.27(목)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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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 남제주문화원이 주최한 연암 최익현 선생 유적비 제막식 때문에 가시리를 다녀왔다. 조촐한 행사였지만 한말 척사위정의 사표였던 최익현 선생을 기리는 뜻 깊은 행사였다. 행사가 끝나자 근처 한천 선생의 묘도 둘러보았다. 여말선초의 혼란기에 불사이군의 뜻 때문에 유배돼 청주한씨 제주입도조가 된 선비의 자취를 본 것만으로도 흡족했다.

 게다가 돌아오는 길에 성읍2리 ‘외딴집’에서 조각가 김숙자 선생과 그 작품들까지 직접 보는 기쁨까지 누렸다. 김숙자 선생은 소위 육지 사람이다. 육지 사람들 가운데 제주도를 무대로 자취를 남긴 사람들은 많지만 우리는 그런 사실을 모르거나,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녹색제주연구소의 제주유배문화해설사 양성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유배인들의 자취를 만나는 일이 특히 아쉬웠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흔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방치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지막 제주유배인 남강 이승훈 선생의 조천 적거지는 관심 밖에서 허물어지고 있었고, 영구춘화(瀛邱春花)의 본거지로서 최익현 선생이 환호했던 방선문은 낙석 투성이였다.

 제주시에는 한라일보가 애를 써서 유배인들의 자취마다 표석을 세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또한 이목을 끌지는 못하지만 허리를 구부려 들여다보면 비로소 외환은행 근처가 운양 김윤식 선생의 적거지였다는 것을, 그리고 국민은행 근처가 광해군이 숨을 거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이 얼마나 새로운 반가움인가.

 유배인 외에도 칠성통에 있는 ‘백치 아다다’ 계용묵 선생의 피난시절 자취를 알려주는 표석 같은 것은 색다른 느낌을 준다. 그러나 사람마다 서귀포 이중섭 미술관처럼 대단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의 자취가 다만 표석 하나로 마감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쉬운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타계한 사진작가 김영갑 선생을 위한 후원회 결성은 매우 뜻이 좋다.

 여러 육지 사람들 가운데서도 제주도가 기억해둘만한 소설가들이 몇 있다. 노벨 문학상 후보자로 거론되는 고은 선생과 황석영 선생이 그렇고 한수산 선생도 빼놓을 수 없다. 최근에 들어서는 ‘은어낚시통신’의 윤대녕 선생이 제주도에 자리를 틀고 있고, 올해 ‘몽고반점’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이 세화리에 칩거했었다. 신경숙도 성산포에서 그러했다.

 이들 가운데 관심을 끄는 사람은 아마도 임철우 선생이 으뜸일 게다. 80년대 최고의 작가로 주목을 받았던 임철우 선생이 광주사태를 무대로 한 그 무서운 소설, ‘봄날’ 5권을 제주도에서 집필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봄날’을 쓰려고 제주도를 찾았고, 다 쓰자 제주도를 떠났다. 우리에게 소설읽기의 행복과 고통을 선사해준 ‘봄날’을 쓰는 동안 돈이 떨어지자 가외로 썼던 소설이 ‘등대’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들을 기억해야 하는가? 지나간 얘기지만 이중섭 미술관 건립을 두고 이런 공방이 있었고 반대론자도 적지 않았다. 제주도의 주체성을 소중히 하려는 사람들의 애정 어린 충고였을 것이다. 그러나 유배문화가 제주문화의 한 영역으로 자리를 잡았듯이 그들의 자취도 제주문화를 만드는 중요한 자양이다. ‘제주유배문화관’을 건립하려는 것처럼 만약에 ‘제주문학관’이 건립되어 한편에 그들의 자취를 정리하고, 전시할 수 있다면 큰 가치가 있을 것이다.

 제주국제평화센터에 제주도를 방문했던 저명인사들의 밀랍인형이 전시된다지만 걸출한 육지 문화예술가들이 제주도에서 남긴 작품들을 전시하는 일과 비하자면 차라리 후자가 더 의미가 클 듯도 하다. 특히 요즘에는 쾌적성 때문에 훌륭한 육지 문화예술가들이 제주도를 많이 찾는다. 이왈종 화백은 제주도 사람이 다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자취를 기억하자고 하면서 필자는 이 말에 대해 금방 후회를 한다. 왜냐하면 박제화된 기억의 제단은 차라리 그것을 외면함만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자취가 기억되지 않는 제주문화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그 기억이라는 것이 관광지의 또 다른 상투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다만 어렵고 어려울 뿐이다.

<양진건/제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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