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61)유수암리 검은덕이 마을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61)유수암리 검은덕이 마을
댓잎만 슬피우는 유구한 역사의 마을
  • 입력 : 2008. 10.28(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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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발발 이후 60년이 흘렀지만 검은덕이 마을엔 당시의 집터들이 대나무 군락에 덮여 있다(사진 맨 위). 고통의 역사를 안고 검은덕이 마을에서 평생을 살았던 강우생 할머니의 초가(가운데). 마을 사람들이 토벌대를 피해 숨었던 작벽 아지트.

먼길을 돌아 설촌 7백년이 넘은 검은덕이 마을에 섰다. 4·3 이후 60년 세월이 흘렀으나 다시 마을로 돌아온 주민들은 10여호에 불과하다.

마을을 둘러보면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와 올레 길에 대나무만 무성하고 마을공동체의 정신적 고향인 '하르방당과 할망당'이 정겹게 마주보고 있다.

검은덕이는 해발 3백m지점에 위치해 있다. 사람들은 검은덕이 하면, 그곳이 어딘가 하다가도 금덕(今德)이라고 하면 쉽게 그 위치를 가늠하곤 한다.

애월읍 금덕리는 1996년 '유수암리'로 마을 이름을 변경하였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금덕과 유수암은 두 개의 마을이었다. 옛지도와 탐라순력도를 보면 현재의 유수암리를 유수암촌으로 검은덕이를 흑덕촌(黑德村), 감은덕촌(感恩德村), 거문덕촌(巨文德村)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거문덕 오름을 흑덕악으로 표기하고 있다. '언덕 위의 오름'이란 정겨운 뜻을 가진 검은덕이 마을은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고려 말기에 명명된 것으로 보아 현재 유수암 본동 보다 먼저 설촌이 된것으로 보인다.

장구한 설촌 역사

유수암리는 4·3 당시 금덕1, 2구로 나뉘어 1구 1백20여가구, 2구인 검은덕이는 50여 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4·3 발발 초기부터 사태가 종결될 때까지 인명 희생이 끊이지 않았다.

검은덕이 마을의 4·3으로 인한 희생은 아이러니하게도 우익단체인 대동청년단에서 활동하던 마을 중심청년 12명이 제주경찰서로 끌려가면서 시작되었다. 마을의 아낙들은 삼일에 한번씩 남편의 옷과 먹을 것을 준비하여 경찰서를 찾아가기도 했다. 이들은 육지형무소로 보내지기도 했으며 일부는 석방됐다.

12명의 대동청년단원들이 연행된 이후 마을의 분위기는 점점 흉흉해지고 있었다. 추수철이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농사일보다도 언제 잡혀가 무슨 변을 당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추수가 한창일 무렵인 10월27일, 제9연대 군인들이 마을을 에워싸고 조여들었다. 군인들은 이른 아침에 마을을 수색하다가 강기일(30)과 강치주(37)를 붙잡아서 평선이몰내와 산천동산에서 학살했다. 이 날 있었던 학살은 마을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을 주었다. 두 젊은 청년을 죽이는 방법이 이를 데 없이 잔인했기 때문이었다.

하가리 육시우영에 이어서 원동 마을로 이어지던 11월13일의 학살은 소문만으로도 끔찍했다. 검은덕이 주민들은 마을초입에 빗개를 세우고, 군인토벌대 들이 올라온다는 소리만 들리면 모든 일을 제껴두고 숨기에 바빴다.

무도한 학살극

검은덕이에 소개령이 내려진 것은 1948년 11월20일의 일이다. 군인들이 마을에 들이닥쳤으나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군인들은 텅빈 마을을 일일이 수색하며 집안에 남아있던 노약자들에게 구장 집으로 모이라고 했다.

이튿날 새벽, 숨어있던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날에 있었던 상황을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듣기가 바쁘게 사람들은 그날로 소개를 내렸다.

검은덕이 사람들의 소개지는 한곳으로 집중되지 않고 여러 마을로 연고가 있는 곳에 따라 나눠졌다. 구엄과 하귀 광령과 외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가장 많은 주민들이 소개를 내린 곳은 수산리였다. 수산은 지리적으로도 가까운 곳이고 농사일로 왕래가 잦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산은 다른 마을 사람들까지 소개를 내려와 있었으므로 친척이나 연고가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따뜻한 대접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나마 남의집 쇠막이라도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은 겨울나기가 수월하였을 터이지만 아무런 연고가 없는 사람은 무자년의 겨울을 나기가 고통 그 자체였다.

4·3이 고통을 온몸으로 안고 고향 검은덕이에서 몇 년전 생을 마친 양씨 할머니는 생전에 이런 증언을 하였다.

"당시 남편은 산에 토벌을 갔다가 돌아왔는데, 징용갔다 온 사람을 지서에서 잡아갔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들은 남편은 그들을 심어갔으니까 난 죽은 목숨이라고 말을 했다. 아닌게 아니라 지서에서 순경들이 와서 남편을 잡아갔다. 신을 신고 집을 나가면서 난 죽은 목숨이라고 했다. 남편은 잡혀간 다음날에 외도에서 철창에 찔려 죽었다. 남편이 죽은 날은 음력으로 11월27일이다. 남편이 죽은 지 이틀 후에 시아버님과 백부님 등이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려고 도근내로 갔다. 그런데 순경들이 막아섰다. 큰아버지나 다른 사람들은 감히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시아버님은 아들이 죽었는데, 죽은 아들의 시신을 거두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며 시신을 수습하려고 하였다. 당신은 이제 살만큼 산 목숨이라며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려는데 순경들이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당시 시아버님의 연세는 66세였다. 아버님이 죽고나자 아무도 시신을 수습하려고 나설 수가 없게 되었다."

고난의 소개 생활

검은덕이 사람들의 소개생활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죽음의 겨울을 넘기는 사이 많은 사람들이 유명을 달리했고 축성작업과 성을 지키는 일로 고단함을 면할 수 없었다.

1949년 5월, 검은덕이 주민들은 장전리로 이주하게 된다. 장전리에 함바집촌을 만들고 소개민을 임시 수용했던 것이다. 당시 장전 함바집에서의 생활은 수용소 생활과 진배없는 나날이었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만은 어느정도 가셨으므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은 자의 시신을 거두는 일이나 먹고 살 일들로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검은덕이 주민들은 1949년 10월, 유수암 본동으로 올라와 성을 쌓고 2차 집단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많은 주민들은 유수암 소개지로 오는 것을 거부했다. 고향 마을과 가까워졌다고는 하지만 유수암은 고향이 아니었다.

검은덕이 주민들이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은 1951년의 일이다. 하지만 몇가호에 불과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주민들은 폐허가 된 마을에서 살 집을 마련해야 했다. 주변에 나무를 잘라다가 집을 짓고 지서의 감시를 받아가며 적은 인원으로 성을 둘렀다.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마을의 한켠에 모여 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집은 성 안에서만 가능했기 때문에 원래 살던 집터를 고집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일어서는 마을

현재 둘러본 검은덕이 마을터는 상당히 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내창을 중심으로 해서 서쪽으로 평평한 분지가 그 중심지였다. 그곳은 전부 밭으로 변해 있었지만 4·3 당시에는 밭 하나에 서너가호의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올레의 모습은 예전 그대로 남아있다. 또한 냇가 동쪽으로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했던 도가터와 그 주변의 집터들, 2000년도에 마을 청년들이 세운 검은덕이 마을표석이 정겹게 서 있다. 삼거리를 중심으로 집들이 새로 지어졌지만, 하가와 애월로 가는 큰 길이었던 길쪽에는 당시 집터였음을 보여주는 대나무의 군락이 바람에 흔들린다.

당동산 본향당 옆에는 토벌대들을 피해 은신했던 개인 작벽 아지트가 지금도 남아 있다.

<4·3연구소 이사 osk4843@hanmail.net>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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