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4·3 당시 제주항 전경. 항구 내의 큰 배는 미군LST 함정이며, 그 뒤편으로 주정공장 건물이 보인다(사진 왼쪽). 4·3이후 60년이 흐른 현재의 제주항은 엄청나게 발전하였으나, 그 당시의 수장의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
제주항은 오고 가는 사람들과 각종 화물 하역작업 등으로 늘 부산하다. 일제 강점기인 1927년 5월 개항된 후 수많은 이별의 이야기를 제주도민의 가슴속에 쌓아온 제주항은 제주특별자치도의 관문항이며 국제관광무역항으로 나날이 변모하고 있다.
그러나 제주항은 일제시대의 식민지 수탈과 4·3 시기에 벌어졌던 수많은 역사의 상처도 함께 기억되고 있다.
특히 4·3 당시에는 재판절차도 없이 불법으로 수많은 제주도민들을 배에 태워 바다로 나가 던져버린 수장사건이 비일비재했으며, 인간의 목숨이 파리목숨보다 하챦은 시절이라 군경토벌대의 무도한 수장학살 행위도 쉬쉬 전해지곤 했다.
죽음과의 고별, 제주항
수장희생자들의 유족들은 대개 당시 친인척 경찰들의 전해주는 말로 죽음의 내력을 들어 그날로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많다.
처음에는 짠물을 먹으며 고통스럽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너무 불쌍하고 칭원하여, 그 고통이 살아 있는 자신의 몸으로 전이되는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
오죽하면 유족들은 시신이 쓸려가 올랐다는 대마도까지 찾아가 무혼굿을 하며 이국의 바다에 청정한 삼다수를 부었을까.
이제라도 봉물 대신 마음껏 산물을 드시라는 유족들의 간절한 마음에서 였다.
제주항은 차마 인간이 할 수 없는 수장이라는 목불인견의 모습을 지켜보았으며, 하늘길의 관문인 제주국제공항의 집단학살과 함께 바다길의 관문인 제주항도 수장이라는 4·3의 비극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또한 제주항은 국군, 경찰, 서청 등 각부류 응원대, 각종 무기 등이 들고 나던 4·3의 시종(始終)을 상징하는 현장이기도 했다.
게다가 제주항 정면 육상에는 4·3 당시 주민들을 수용하던 최대의 수용소이자 감옥이었던 주정공장 창고가 위치해 있었다.
이 곳은 당시 귀순하거나 잡혀들어온 주민들을 갖은 고문과 불법재판을 통해 육지부의 형무소로 보내지거나, 인근의 사라봉이나 정뜨르 비행장으로 끌려가 총살 당하던 삶과 죽음의 경유지였다. 제주항에서 실려나간 사람들 또한 육지형무소로 보내지거나 수장을 당하는 등 돌아오지 않았다.
4·3시기의 제주항은 만남과 이별의 애틋한 이야기 보다 죽음의 고별이 넘쳐나는 한과 눈물의 장소였던 것이다.
비밀리에 집행된 수장
비밀리에 집행된 민간인들에 대한 첫 수장은 국군9연대에 의한 초토화 작전이 한창 벌어지던 1948년 11월 5일에 이뤄졌다. 재판도 거치지 않은 채 이들을 제주 앞바다에 수장했다. 그 희생자 숫자에 대해 경찰 관계자는 20명으로 밝혔으나, 한 민간인은 33명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당시 군당국에 의해 은밀히 추진된 이 수장작전은 한 시신이 떠올라 유족의 손에 안겨지면서 그 실체가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죽은 모습으로 수장의 실상을 밝힌 희생자는 당시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신한공사 제주농장 직원이었던 김기유(26)다.
김기유의 누님인 김기순 할머니는 생전, 이 사건에 대해 "어머니와 아버지는 산지 포구에서 외도에 이르는 바닷가를 매일 미친듯이 돌아다녔습니다. 나도 화북과 삼양 바닷가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열흘쯤 지났을 무렵인데 몸이 퉁퉁 부어오른 시신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한 것은 모두 알몸이었습니다. 내가 듣기론 배에서 옷을 입힌 상태에서 한명 한명 총을 쏘아 바다에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했던 겁니다. 나중에 안 사실은. 우리 동생 일행을 죽인 후에도 사람들을 바다에 던졌는데 그때는 모두 옷을 벗겼다는 겁니다. 그런 무정한 세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라고 증언한 바 있다.
▲주정공장 옛터에 세워진 4·3 내력비.
예비검속과 수장
수장을 집행하면서 인적사항의 흔적을 없애려고 수십명씩 알몸으로 학살하였다는 사실은 4·3당시의 수장이 얼마나 잔혹하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할머니는 이러한 사실을 사람들을 싣고 간 배의 선원으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이날 동일리 김두봉의 부인 문규월(28)도 체포령이 내려진 남편이 피신한 관계로 희생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직후에 일어났던 예비검속은 제주도의 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이승만 정부는 즉각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과 '불순분자 구속 처리의 건' 등의 치안국 통첩을 각 도 경찰국에 하달하여 보도연맹원 및 요시찰인물에 대한 검속을 단행하였다.
계엄당국은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에 가입됐던 사람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 때 제주지구계엄당국에서도 4개 경찰서의 집행하에 1천5백명 이상의 주민을 검속한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이 제주도의 예비검속과 뒤이은 집단학살의 집행이었다. 이 연장선 상에서 1950년 8월 4일 대규모의 수장학살이 이루어졌다.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제주경찰서·주정공장 등지에 수감되어 있던 예비검속자 수백 명을 제주항으로 끌고 가서 배에 태우고 바다 한가운데로 가서 수장시켰다.
당시 국민방위군으로 제주항 부두파견 헌병대에서 경비 근무를 했던 장시용의 증언에 의하면, 밤 9시쯤에 50명씩 태운 차 10대가 부두에 도착하여 알몸 차림의 5백여 명의 사람들을 배에 태우고 바다로 나아갔다가, 두 시간 정도 지나서 빈배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당시 해병대 군무관으로 근무하던 박춘택과 제주항에서 화물선박을 출항시키던 김인평도 주정공장에 수감되어 있던 상당한 수의 예비검속자를 해군 경비정에 태우고 가서 수장시켰다고 증언하였다.
"그날 밤에 부두파견 현병대에 배치가 되었습니다. 저녁 8시경이 되니까 그곳이 한쪽은 사무실이었고 맞은 편 한쪽은 창고였습니다. 사무실이나 창고는 작았어요. 3~4평쯤된 창고 안에 들어가서 보니까 밖을 볼 수 있게 유리창이 30~40cm 정도로 박아진 것이 있었습니다. 시간은 아홉시 조금 넘는 시간이었습니다.
배는 부두에 정박에 있고 왜정 때 고기잡던 배인데 배는 1백톤이 조금 넘을 듯한 배입니다. 그 배가 있는 쪽으로 차가 옵디다. 그 때 차가 들어오는데 보니까 꼭 열 대였습니다. 바로 내 앞에서 하는 일이니까 숫자를 셀 수 있었습니다. 바로 연병장 부두 앞에서 벌어진 일이지요. 여자고 남자고 옷을 입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전부 옷을 벗은 알몸이었습니다. 작은 줄로 사람을 뒤로 포승 채우듯 큰 줄로 사람들을 엮어서 차에 태워 배로 가는 것입니다. 차 한 대에 50명씩 태웠으니까 차 열대로 꼭 5백명이었습니다. 유리창을 통해서 바로 눈앞에서 셀 수 있는 사람이 틀림없는 5백명, 더도 덜도 아닙니다. 그 사람들을 싣고 나가버리니까 나는 창고 안에서 나왔습니다. 그곳에서 보니까 5백명을 태운 배가 나가는데, 멀리도 안나간 것 같습니다.
그 배가 들어오는 시간이 두시 반에서 세시쯤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 배가 들어오는데 사라봉 위로 달이 떠올라왔습니다. 보름이 지난 것은 확실하고. 그 일이 하도 어마어마한 일이 어서 엊그제 본 것 같이 또렷합니다."
살찐 갈치들
수장 사건의 뒷말은 많다. 당시 어부로 생활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1950년 가을, 갈치를 낚으면 징그러울 정도로 컸는데, 그 갈치들은 수장된 시신들을 먹고서 그렇게 살찌고 컷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그해 갈치를 거의 먹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올해로 4·3 60주년을 맞고 있다. 그동안 수장에 대한 이야기들은 풍문으로만 떠돌고 있을 뿐 실상을 밝일 자료는 아직도 부족하다.
제주항은 4·3 당시 벌어졌던 무도한 수장학살의 사실을 오늘도 무심히 물결위에 전하고 있다.
<4·3연구소 이사 osk4843@hanmail.net>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