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62)대정고을 동헌터와 삼한질 희생터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62)대정고을 동헌터와 삼한질 희생터
역사의 땅에서 말없이 스러져 간 사람들
  • 입력 : 2008. 11.04(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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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당시 동헌터는 밭이었으나 지금은 보성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교문 옆의 동계 정온 유허비가 더욱 외롭다.(사진 위) 성벽 위에서 무차별하게 총살했던 삼한질의 최근 전경. 당시에는 밭이었다.

대정지역은 조선시대 말기 폭악한 관리들의 압정에 대항하여 봉기의 들불이 일어났던 각종 항쟁의 발상지이다.

특히 반봉건반제 항쟁으로 조선 조정과 프랑스까지 영향을 주었던 '1901년제주항쟁(신축민란)'도 이곳에서 일어났으며 그 항쟁의 장두 이재수는 대정고을 출신이다.

지금은 추사적거지가 위치하여 더욱 유명해졌으나, 보성·인성·안성리 3개 마을은 구한말 까지만 해도 '대정고을'로 불려왔으며 그 전통은 지금도 살아있다. 이는 조선 초기 제주도가 제주목·정의현·대정현으로 정립될 때 대정현청이 소재했던 마을이기 때문이다.

대정고을은 마을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 하나의 마을처럼 인식되기도 하며 해방직후의 인민위원회도 '대정고을 인민위원회'로 통합되어 조직되었다.

4·3 당시 마을 규모는 인성리가 동·서 마을을 합해 2백호, 보성리는 상·하동을 합해 1백70호, 안성리는 60호 정도였다.

대정고을의 비극

대정고을은 4·3초기부터 군·경토벌대의 주목을 받았으며 초토화작전과 예비검속 등 4·3의 과정을 거치며 1백여명의 희생되었다.

1948년 4월 3일, 봉기가 발발하면서 보성향사에 자리잡았던 대정지서는 무장대의 공격을 받아 이무웅 순경이 숨졌다. 이어 한달 여 만인 5월 20일에는 국방경비대 9연대의 일부 군인들이 탈영하여 대정지서를 습격했고 이 날 지서에서 근무하던 경찰 4명과 급사 1명이 숨졌으며 협조원 등 민간인 2명이 부상을 입었다.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면서 대정고을에서는 두 건의 집단학살사건이 발생했다. 두 사건 모두 소위 '도피자 가족'과 '산에 협조한 사람'들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주민들을 강제동원해서 총살 장면을 지켜보도록 한 공개총살이었다.

첫 사건은 1948년 11월 20일 '동헌옛터(현 보성초등학교)'에서 이루어 졌으며 두 번째 사건은 12월 6일 '삼한질 앞밭' 에서 집행되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에 대해 대정고을 주민들은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주민들이 '동헌터 학살사건'이라고 부르는 10월 20일의 집단학살은 지금의 보성초등학교 교문 부근에서 일어났다. 조선시대 대정현청의 동헌이 있었던데서 동헌터라고 불렸으며, 이 곳에서 희생된 주민은 20여명에 이르고 있다.

"아무데서라도 죽였어. 지서 앞에서도, 드르밭 같은 데서도, 이 동헌터에서도. 마을 사람들에게 구경허래 나오랜 허영 우리 보는 앞에서 그쟈 팡팡. 생각하면 몸서리가 나. 어떵핸 난 아니 죽어져신고."

보성교 정문 앞에 살고 있는 한 주민은 당시 학살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사람을 앉혀. 한사람이 하나씩 군인이 총을 겨누고 있다가 중대장이 총을 한번 '빠방' 쏘면 쫙. 어떻게 해선지 눈물도 안나와. 혼백이 다 나가버리니까, 죽었는지 확인하고 죽지 않았으면 또 죽이고. 그때 동백이하고 세사람이 살아났어. 나중에 군인으로 갔다 와서 죽었지만, 혼백이 달아난 얼굴이라 파래."

얼마나 처참했으면 혼백이 달아나고 눈물마저 메말라 버린 것일까.

동헌터의 죽음들

동헌터 학살의 현장에서도 오동백, 정여찬, 임춘부 등 3명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나 이들 중 정여찬과 임춘부는 6·25 당시 참전했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동헌터 학살의 희생자는 강문보(34·남·보성리) 고기창(63·남·인성리) 고추자 (20·여) 기경출(30·남) 기창민(52·남·이상 인성리) 송두욱(29·남) 이경인(20·남) 이태일(21·남) 정두경(51·남·이상 보성리) 등이다.

이 학살사건 뒤 보름 뒤에 이어진 '삼한질거리 학살사건'은 주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지금은 새로운 길이 뚫려서 사거리가 되었지만 당시 삼거리의 큰길이었던 삼한질 거리는 추사적거지 동쪽 성벽과 붙어 있는 거리이다. 이 삼거리 바로 앞 밭도 대정고을의 잊을수 없는 학살터였던 것이다.

삼한질의 대학살

당시 중산간 마을의 소개로 인하여 신평·구억리 등에서 많은 주민들이 내려와 있었는데 삼한질거리 학살 때는 소개민들도 더러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여자들도 몇사람 있었으며 대부분은 무장대에 협조했거나 도피자가족이라는확인되지 않은 혐의로 대살되었다.

"그날 아침에 모두 지서(당시 안성리 향사가 임시 지서로 사용)로 나오라고 해서 그 지서 앞에서 죽였어. 그때 죽은 사람이 안성리에서만 한 20명쯤 될거라. 그날 제사집이 13~14가구는 될거라. 우리 보는 앞에서 일렬로 세워가지고 죽였어."

이 삼한질 거리 학살은 대정현 성벽에 군인들이 올라가 앞밭을 향해서 무차별 난사하여총살했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군인들 대부분은 성벽에 올라가서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사격연습을 하듯 학살을 했습니다. 여자가 네사람인가 다섯사람이 있었고 대부분이 가족중에서 누구 한사람 마을에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고 해서 대신 학살된 것이지요. 그 때는 누가 이름만 잘못 거명해버려도 이 세상사람 되기 힘들때니까."

구억리의 고정부씨는 숙부의 비극적인 희생을 담담히 기억한다.

"그 당시에 인성리 출신 경찰책임자에게 찾아 가서 살려달라고 애걸 복걸한적도 있습니다. 인성리 삼한질 밭에서 17명인가 눈을 가리고 해서 사살하려는데 작은 아버지(고태혁)가 여기서 죽으나 뛰다가 죽으나 생각하여 도망쳤다고 합니다. 5백m정도 달려갔는데 그때 눈을 가리고 손을 묶은 채였습니다. 어떻게 뜁니까? 마을 밑에 숨어 있는 것이 발각되어 현장 사살되었는데 시체도 못가지고 가게 했습니다. 바로 시신처리도 못하게 해서 3일 후에야 경찰관의 지시를 받고 처리했다고 합니다."

삼한질 학살의 희생자는 김달삼의 장인 강문석의 아내 등 강기춘(31·남·안성리) 고태혁(19·남·구억리) 김순선(20·여·보성리) 김영기(19·남·안성리) 김오복(60·남·안성리) 김운기(26·남·보성리) 김유선(26·남·구억리) 김재평(59·남) 김해득(44·여·이상 안성리) 류병근(26·남) 류봉우(47·남·이상 인성리) 박근양(26·남) 박신학(38·남·이상 구억리) 박인진(22·남·신평리) 송기용(45·남·안성리) 송두백(42·남·보성리) 송응일(18·여) 이응순(26·여·이상 안성리) 이태수(46·남·인성리) 이평식(59·여·안성리) 임선진(51·남·신평리) 허인수(19·남·인성리) 등이다.

끝없는 죽음의 세월

대정고을의 경우 이 두 번의 학살 말고도 다른 곳으로 끌려가서 학살된 경우가 많아서 피해자를 전부 파악하기 조차 힘들다.

특히 무장대의 삐라살포 사건에 억울한 혐의를 뒤집어 써 보성초등학교 송병길 교장등 교사 6명이 경찰에 의해 총살된 사건은 지금도 너무한 일이라고 주민들은 말한다.

이 마을은 다른 마을과는 또 다른 학살의 형태로 구별할 수 있는데 다른 마을의 경우는 무장대의 습격이 있을 때 그에 대한 보복으로 학살한 경우가 많았지만 이 마을은 바로 지척에 국군제9연대에 이어 2연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유격대의 습격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대정고을은 인민위원회를 주도한 인사들이 입산과 9연대 군인들의 탈영입산으로 이 같은 보복학살이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4·3연구소 이사 osk4843@hanmail.net>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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