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시절 주린 배 채워주던 보리밥은 향수 자극
‘개역’은 고단한 노동 버틸 수 있었던 힘의 원동력
[한라일보] 뜨거운 햇빛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에는 물도, 커피도, 콜라도 무언가 아쉽다. 그런 날에는 냉장고 문에 놓인 시원한 보리차가 간절하다. 시원한 보리차 한 잔이면 머리끝까지 올라온 열기가 쑥 내려가며 여름을 버틸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지금은 정수기나 물을 사 먹는 가정이 많지만 201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가정에서 직접 보리차를 끓여 마시곤 했다.
시간을 좀 더 거슬러 가자면 1980년 이전에는 제주의 주식은 보리였다. 땅이 척박해 먹을 것이 늘 부족했던 제주에서 흰쌀밥은 부잣집이나 먹을 수 있었고 그나마 형편이 괜찮은 집은 보리와 쌀을 반반 섞은 '반지기밥'을 대부분의 가정에선 보리밥에 고구마, 감자, 톳을 넣어 부족한 양을 늘리곤 했다.
▶여름을 알리는 보리 수확=제주의 보리는 5~6월 사이 봄 끝과 여름 시작에 수확한다. 그래서 제주의 어르신들은 보리 수확이 끝나면 계절의 변화를 인식한다. 이 시기 제주 사람들은 보리밥과 자리를 먹으며 다가올 여름을 대비한다.
제주 사람들의 일상과 함께해 온 보리이지만 앞으로의 상황은 밝지 않다. 과거에는 식용으로 쓰는 쌀보리의 농지 크기는 2만4533㏊에 달했지만 2022년에는 100㏊ 미만까지 줄었고 맥주보리 또한 1만1477㏊에서 2189㏊으로 5분의 1 수준으로 감소했다. 이에 제주도는 기능성 보리품종을 보급해 농가소득 향상과 월동채소 수급 조절은 물론 뛰어난 경관 효과로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등 1석 3조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보리 개역.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심심하면서도 깊은 보리의 맛=보리 음식이라 하면 가장 먼저 '보리밥'을 떠올리겠지만 최근 각광받는 것은 '보리빵'이다. 은은한 보리 향과 보드라운 식감, 너무 달지 않은 팥소까지. 처음 먹을 때는 심심해서 무슨 맛으로 먹나 해도 찐빵과는 다른 보리의 구수한 맛과 팥의 조화는 뒤돌면 또 생각나는 맛이다. 도내 유명한 보리빵 가게는 이미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고 보리를 활용한 디저트 가게 또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만약 도민들에게 '개역'이 없다면 매년 여름을 보내기가 지금보다 힘들었을 것이다. '개역'은 미숫가루의 제주어로 가루를 물에 풀어 섞는 제주어 '개다', '개이어'에서 파생됐다. 개역은 보리 외에 메밀, 밭벼, 조, 콩 등 제주의 곡물이나 톳과 같은 해조류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지만 제주사람들은 보통 개역을 말하면 보리 개역을 먼저 떠올린다. 쌀이나 찹쌀로 만든 미숫가루와 다르게 보리 개역은 도정을 하지 않은 보리로 만들어 투박하지만 깊은 맛을 낸다.
봄이 끝나는 시기에 수확한 보리를 잘 말려 곱게 갈아 만든 개역은 여름철 최고 별미로, 며느리가 반드시 시부모에게 먼저 가져다드리는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귀했던 개역은 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서 일하는 목동, 밭일하는 농부, 물질하는 해녀들이 고단한 노동을 버틸 수 있었던 힘이 돼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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