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농업유산 제주의 화전(火田)Ⅱ] (2)떠난 사람들, 남겨진 흔적들-④ 선흘1리 마을의 확산과 화전

[잊혀진 농업유산 제주의 화전(火田)Ⅱ] (2)떠난 사람들, 남겨진 흔적들-④ 선흘1리 마을의 확산과 화전
경작지 찾아 주민 이주·정착… 마을 공간적 확산 계기
  • 입력 : 2024. 10.24(목) 02: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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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곶자왈 원시림지대가 넓게 펼쳐진 제주시 조천읍 선흘1리. 람사르습지로 지정된 이 마을에서 화전은 덕천리와 연결되는 도로 남서쪽 일대를 중심으로 행해졌다. 선흘곶자왈 동백동산습지센터가 있는 입구 맞은편, 마을에서는 '장산동'으로 불리는 지경이다. 장산동은 웃선흘 동남쪽에 있는 '반못' 남서쪽 장산이(장생이)빌레 일대에 형성됐다. 장산동이란 지명은 '장산이(장생이)'를 한자차용표기한 것이다. 새로 형성된 동네라는 뜻에서 '새농네'라고도 했다. 제주4·3사건으로 마을 주민들이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지금은 몇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사진 하단부에 반못이 보이고 상단에 알바메기 오름이 솟아있다. 특별취재단



장생이빌레 일대서 화전·목축

취재팀이 먼저 찾은 곳은 '반못'이다. 이 마을은 선흘곶자왈 내에만 100여개의 습지가 형성돼 있을 정도로 습지마을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반못은 '먼물깍'과 함께 주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한 공간이다.

상수도가 들어오기 전 '새농네' 사람들이 이용했던 반못은 빌레(넓은 암반)위에 형성된 연못이다. 네모난 밭에 물이 고이면서 사람들이 흙을 파내어 물통을 만들었다. 물이 고였다가 빠지는 모습이 한자 밭전(田) 자 처럼 보인다고 하여 처음엔 '밭못'이라 했다. 이후 차츰 '반못'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라고 한다. 예전 먹을물과 빨래 등을 하는 용도로 이용했던 작은 연못 2곳과 얼추 500여 평 정도 되는 큰 연못으로 이뤄졌다.

4·3성인 낙선동성과 주변 일대, 알선흘 지경이다.

이곳 반못 위쪽이 바로 예전 화전을 했던 경작지와 목장지대다. 지금은 일부 건물이 들어서고, 초지와 과수원, 메밀 등을 경작하고 있다. 주변 도로와 경작지 곳곳에는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보여주듯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취재 과정에서 반못에서 만난 고모(1957년생)씨는 '새동네(장산동)'에서 넓은 목장을 운영중이다. 고 씨는 새동네서 태어나서 아랫마을에 살다가 다시 이곳으로 올라와 목장을 하고 있다.

고 씨에 따르면 예전 이 일대는 화전 마을이었다. 부모님이 화전을 했다. 주로 조, 보리, 콩, 메밀 등 곡식 위주로 농사를 지었고, 피는 재배하지 않았다고 했다. 4·3 당시에는 함덕 사람들이 이곳으로 올라와 숨을 곳과 먹을 곳을 제공했다고 한다. 반못은 어릴적 수영을 하며 놀던 곳이다. 고 씨는 함덕에 있는 중학교까지 걸어 다녔기 때문에 여름에는 이곳에서 목욕을 했다. 주민들은 돌담으로 연못을 구분해서 마실물과 빨래를 하는 물 등으로 나눠 이용했다. 할아버지가 밭을 갈아야했기 때문에 소를 많이 키웠는데, 물을 먹이러 이곳에 자주 왔다고 했다. 이 일대는 곳곳에 물이 있어 가축에게 먹일 물이 충분했다.

반못 위쪽 경작지의 대나무숲.



웃선흘·알선흘서 주민 이주

이곳 주민들은 이전 웃선흘, 알선흘에서 장산동 등지로 이주하여 경작지를 개척하고 화전농업과 목축을 했다.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 이주하고 화전 경작을 하면서 정착하는 과정에서 마을의 분화 확산이 일어난다.

이는 옛지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화전동(火田洞)이 처음 표기된 1899년의 '제주군읍지'중의 '제주지도'에는 지금의 선흘리가 상선흘리(上善屹里), 하선흘리(下善屹里)로 구분되어 나타난다. 그 이전 1826년 '감시절목'에는 마을이 구분되지 않고 선흘로만 표기됐다. 이는 적어도 19세기 초반을 지나 중반 무렵에는 웃선흘과 알선흘로 나뉘어 있었고, 이후 '제주군읍지 제주지도'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웃선흘은 지금의 이사무소를 중심으로 한 선흘본동, 알선흘은 낙선동성 주변 일대에 형성됐던 마을이다. 일제강점기인 1918년 제작한 1:50000지형도를 보면 지금 선흘1리에 선흘리 본동과 하선흘, 대수동(大水洞), 장산동(長山洞) 등의 동네가 표시되어 있다. 장산동, 즉 화전민들의 이주로 새동네가 생기면서 마을의 공간적 확산을 불러오고, 마을 지명에도 반영되고 있다.

취재팀이 반못을 살펴보고 있다.

화전 실제적 접근 이뤄져야

이러한 선흘 마을의 분화는 인구가 늘어나는 반면 경작지가 부족하게 되는 것과 관련 있다. 사람들이 경작지를 찾아 이동하고 화전 농업을 하면서 새로운 동네가 생겨나게 된다. 즉 19세기 중후반이 되면서 말 사육 생산과 관련한 마정(馬政)이 차츰 쇠퇴하고 중산간 지대의 국영목장에 화전이 행해진다. 공식적으로 공마제(貢馬制)가 폐지된 것은 1895년(고종 32)이다. 이후부터 화전은 공식적으로 합법화된다. 그렇지만 그 이전부터 중산간 일대서 화전은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 이주하고 화전 경작을 하면서 정착하는 과정에서 마을의 분화 확산이 일어난다.

진관훈 박사는 이를 인구압(人口壓·population pressure) 이론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선흘리 일대에서의 화전은 기존 마을의 농경지가 부족해지면서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사람들이 이동하고 새로운 경작지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화전농업은 제주 중산간지대로 마을의 형성과 확장 등 공간의 분화를 가져오는 한 요인이 된다. 제주의 화전을 단순한 농업의 한 형태로만 접근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중산간 지대로의 마을의 확산과 발전, 역사적 사실들은 물론 다양한 생활상 등 실체적 접근을 위한 노력이 이뤄져야 한다.

※ 이 기획은 '2024년 JDC 도민지원사업'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특별취재단=이윤형 선임기자·백금탁 정치부장·진관훈(제주문화진흥재단)·고재원(제주문화유산연구원)·오승목(다큐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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