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한라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 소금의 집(김영진)

[2025 한라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 소금의 집(김영진)
  • 입력 : 2025. 01.02(목) 00:00  수정 : 2025. 01. 02(목) 17:11
  • 오은지 기자 ejo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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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정지란 작가

[한라일보] 어시장에서 떠내려 온 생선 비늘이 하천 바닥에 누워 하얀 몸을 뒤척였다. 바람이 불어 파르르 몸을 떨던 비늘무더기는 긴 꼬리를 만들며 날아올랐다.

태주는 하천을 반쯤 덮은 콘크리트 구조물 아래를 살피다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옮겼다. 골목을 기웃거리며 걷던 태주는 고양이처럼 등을 구부려 앉은 할머니를 보고 발을 멈췄다. 노인은 손잡이가 구부러진 지팡이 허리를 붙들고 여윈 햇살 아래에서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주는 할머니의 모습을 살피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골목을 따라 구불구불 길게 이어진 시멘트 담장과 빛바랜 건물엔 노인의 주름만큼 골 깊은 균열이 새겨져 있었다.

후미진 골목 사이, 어느 빈 공간에 어머니가 갇혀 있는 건 아닌지 건물의 틈새마다 불안한 태주의 눈길이 찾아들었다. 어머니라면 허름하고 작은 방에 찾아들었을 것이다.

태주는 일을 하며 보았던 혼자된 노인들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수 십 번, 그들의 삶을 정리하는 일을 하며 느낀 것들이었다. 직접 주검을 수습하지는 않았지만 텅 빈 방에 서면 모든 물건에서 망자의 흔적이 보였다. 가만히 바라보면 방안 가득 두려움에 떨고 있는 망자의 넋도 함께 느껴졌다. 누군가의 발걸음을 그리다 육신이 떠난 자리에 영문도 모르고 남겨진 영혼들은 사람들이 드나들 때마다 조금씩 그들과 함께 따라 나와 세상을 떠다닐 것 같았다.



좁은 건물사이를 비추던 햇살이 더 시들해졌다. 할머니는 여전히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 태주는 휴대폰을 들어 메모한 곳들을 다시 살폈다.

길가에 차를 세운 채, 삼층짜리 낡은 여인숙으로 들어섰다. 막 계단을 올라설 때 경기도에서 중학교 선생을 하는 여동생이 전화를 걸어왔다. 깐깐한 목소리를 떠올린 태주는 여인숙 복도를 살피다가 뒤늦게 통화표시를 눌렀다. 혹, 어머니 소식을 알까 싶어서였다.

"오빠, 여태 실종신고도 안 하고 대체 뭘 했어?"

여동생은 다짜고짜 쏘아붙였다. 무엇하나 챙겨주지 않은 게 없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더욱 앙칼진 목소리로 변했다.

"아까 했는데?"

"여기 경찰서거든, 금융정보 조회는 실종신고 한 뒤에 가능하다는데, 가장인 오빠가 뭐하는 거야?"

"가장? 내가 못한 게 뭐…. 여보세요?"

여동생이 전화를 끊었다. 태주의 목소리가 여인숙 복도에 울리자 닭장 안에 있는 닭처럼 노인들이 일제히 문을 열고 태주를 쳐다보았다. 태주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자 저 나이까지 대체 무얼 하며 살았기에 자식도 없이 이런 곳에서 지내는지 울컥 화가 치밀었다.



태주는 어머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또 불안해졌다. 그건 어머니 때문이라기보다 아버지의 유산과 같은 것이었다. 어디에 있건, 무슨 일을 하건 태주는 늘 가슴속에 헛헛한 느낌이었다.



한 달여 전이었다. 밀감 판매사업이 잘못되어 모든 걸 정리하려 외딴곳을 찾아 나섰다. 물건을 대준 사람들, 그동안 믿고 거래해 준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검은색 승용차 뒷자리엔 동네 편의점 주인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담긴 번개탄 한 뭉치와 동그란 화로, 소주 한 꾸러미와 담요 몇 장이 겨울 옷가지와 함께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며칠을 돌아다니다 찾은 곳은 일출봉 근처 바닷가였다.

너른 갈대밭을 끼고 달리자 거대한 일출봉이 따라왔다. 긴 커브를 돌자 일출봉은 룸 미러에서 사라졌다. 태주는 누군가를 따돌린 듯 마음이 후련했다. 두 갈래 길이었다. 차 문에 기댄 채 길을 번갈아 살폈다. 늦가을 볕이 바닷가 검은 바위에 드러누운 해초 위에서 소금처럼 반짝거렸다. 태주는 길가에 차를 세워 밖으로 나서다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팔을 뻗어 차에 기댄 태주는 울컥 솟구친 울분에 하늘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으아! 하느님, 나한테 왜 이러냐고!"

바닷가에 늘어서서 볕을 쬐던 갈매기 몇 마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간 듯 나른해왔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렸다. '밀양아리랑' 연결음이 요란스레 울리는 전화기를 들고 발신자를 살폈다. 어머니였다. 전화기를 노려보다 두세 번 발돋움하고 휴대폰을 힘껏 하늘로 던졌다. 잿빛 하늘로 날아오른 휴대폰은 까만 점이 되더니 곧 지워졌다.

차 앞으로 '생달리'라 쓰인 자그만 이정표가 나타났다. 태주는 문득, 지명이 자신의 처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정표를 보던 태주는 자신보다 마을 이름이 더 측은하다고 생각을 바꿨다. 휴대폰을 들어 마을 이름의 유래를 찾고 싶었다. 주머니엔 휴대폰이 없었다. 마을 안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골목으로 바람이 제법 세게 불더니 제 갈 길을 아는 듯 빠르게 빠져나갔다. 마을은 소금에 절인 듯 숨이 죽어 있었다.

도로 끝, 소금밭 팻말이 서 있는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오래전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던 곳이었다. 지붕을 씌웠던 재료는 사라지고 앙상한 나무 구조물만 남은 자그마한 집이었다. 벽은 돌틈을 메웠던 시멘트가 떨어져 나가 겨울바람이 들락거리며 집 안에 자란 잡초를 흔들어 깨웠다. 건물 안쪽 벽에선 군데군데 희부윰한 색이 여린 햇살에 놀라 눈을 희번득거렸다. 소금의 집이었다.

태주는 밖으로 나오며 소금을 생각했다. 바닷가를 메워 천일염을 만드는 염전이 들어서며 소금을 끓이는 자염(煮鹽)이 사라졌다. 천일염을 대량 생산하며 많은 이들에게 돈을 안겨주었지만 인간이 만든 오염물질이 영향을 주어 다시 자염(煮鹽)을 만들거나 암염(巖鹽)에 관심을 돌리는 이들이 생겨났다.

아버지가 남긴 건 한 줌 소금 같은 집이었다. 사업자금이 모자라 허덕일 때마다 어머니는 그 집을 팔아 남들에게 굽신거리지 말라고 했지만 태주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하나뿐인 집을 날리고 싶지 않았다. 태주는 생각에 잠겨 주인 잃은 개처럼 골목을 기웃거렸다.

승용차 유량계가 바닥을 가리켰다. 태주는 그제야 우중충한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죽기 좋은 날은 아니구나!"



이 년 전 봄부터 시작한 밀감 유통 사업은 한동안 잘 풀렸다. 새로운 품종을 온라인 쇼핑 사이트에 올릴 때마다 몸은 바빴지만 웃는 날이 많았다. 건설업을 하다 우후죽순 몰려든 업자들 탓에 손 털고 밀감 유통에 뛰어들었다. 건설업을 그만둔 건 사실, 아이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돌아간 집사람이 보내온 이혼소장 덕분이었다. 건설업계의 치열한 수주 경쟁을 견디며 아이들 얼굴을 제 때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태주는 여리고 판단이 성급했다. 커다란 덩치에 비해 유약한 성격 때문에 늘 손해를 보았다.

결혼하고 십오 년 만에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돌아와 지내다 밀감 유통 사업을 시작했다. 제주에서 일 년 내내 쏟아지는 밀감을 유통하는 일을 태주는 바닷물로 소금을 만드는 일이라 생각했다. 경매시장 낙찰가보다 한두 푼 더 얹어주면 앞다투며 물건을 넘겼다. 사업이 자리 잡힐 무렵, 부산상회 정 사장에게 크게 물건값을 뜯기고 주저앉았다가 주변 지인들의 도움으로 다시 시작했다.

"태주 씨! 그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 좀 바꿔! 나이가 몇 갠데 그러고 살아?"

새로 나온 밀감을 들고 찾아온 제주농장 김 사장이 소리를 질렀다. 태주는 아랑곳 않고 주머니에서 밀양아리랑 연결음이 나오는 전화기를 꺼내 화면을 검지로 퉁겨내며 말했다.

"얼마나 좋아요? 이런 음악을 들으면 없던 흥도 나더라고요!"

김 사장이 가져온 밀감을 여동생에게 보내던 어머니의 손이 자꾸만 주소 쓰는 칸을 벗어났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여동생이 처음 사준 자주색 꽃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어머니는 작은 글씨로 써야 할 칸을 벗어나 다른 칸까지 주소를 크게 적었다. 태주는 메모지에 적힌 경기도의 'ㄱ' 자 끝이 유난히 길다고 생각했다. 밀감 박스를 두드리며 잘 가라던 어머니는 글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그렇다며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자주색 꽃무늬 블라우스 소매 끝 실오라기 몇 개가 하늘거렸다.

다시 시작한 밀감 사업은 잘 버티는 듯했다. 여름이 지나며 성급하게 계약한 밀감이 화근이었다. 수확전에 오래도록 비가 내렸고 바람이 불었다. 밀감은 당도가 떨어졌고 껍질이 터져 나갔다. 갈수록 경매가가 떨어지고 거래처는 반품을 요구했다.



어두워지기 전에 적당한 자리를 찾아야 했다. 천천히 차를 움직이며 한적한 곳을 살피고 있을 때, 차를 유도하려는 것처럼 두 줄기로 하얗게 빛나는 길을 보았다. 그 길로 누군가에게 끌려가듯 들어섰다. 길 양쪽으로 갈대가 끝없이 펼쳐졌고 군데군데 얕은 바다를 헤엄치는 검둥오리, 도요새, 쇠물닭 무리들이 보였다. 멀리 기다란 다리를 흐느적거리는 중대백로의 움직임도 보였다. 차를 움직이자 갈대 이삭이 웅크리고 있다가 일제히 손을 흔들었다. 길을 보며 태주는 소금을 지고 나르는 여인들의 행렬을 떠올렸다. 길은 소금을 나르던 이들이 흘린 피땀이거나 삶과 죽음의 경계에나 있음 직한 모습이었다.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빨려 들듯 나아가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갈대밭 사이, 사람들의 눈길을 벗어난 곳에 차가 들어갈 만한 좁은 길이 보였다. 하얀 길이 알려준 곳이었다. 태주는 그곳에 철새 방역을 위해 뿌려둔 하얀 생석회를 보고 숨을 쉬듯 짧은 탄식을 뱉어냈다. 운전대를 잡은 손이 가늘게 떨렸다.



검푸른 어둠이 화선지에 뿌려진 먹물처럼 희미하게 빛이 남은 바다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태주는 좁은 길을 따라 차를 움직였다. 번쩍, 태주의 앞에서 불빛이 비추고 경광등을 번뜩이며 구급차가 빠져나갔다. 옆에서 차가 다가오는 걸 보지 못했다. 깜짝 놀라 잠깐 구급차를 바라볼 때, 태주의 차가 콰직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작은 승합차의 문이 열리고 통통하고 머리가 벗어진 칠순 노인이 하얀 방역복을 입고 차에서 내렸다. 태주는 차 안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노인이 창가에 선채 문을 두드렸다. 태주가 창을 내리자 노인이 순식간에 차 안 분위기를 훑어봤다. 태주는 아차 싶어 뒤를 돌아보았지만 노인은 뒷좌석에 있던 번개탄과 화로까지 둘러본 다음이었다. '피식' 웃음소리와 함께 노인의 쇠를 긁는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거렸다.

"젊은 놈이…, 집에 가서 곱게 죽어! 나 같은 놈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여긴 재수 없는 곳이야, 오죽하면 '여우 바당'일까. 자네, 돈이 없어? 애인 때문인 것 같진 않고. 이리로 찾아와!"

노인이 던진 명함이 운전대 위로 떨어졌다. 유리창에 비친 금박 글씨가 바다 위 불빛처럼 빛났다.

"죽는 건 한가할 때, 나한테 전화하고 죽어! 그리고 차 수리비는 나중에 갚아!"

노인은 찌그러진 승합차를 끌고 곧 멀어졌다. '제주 장의사 사장 조웅연' 까만 바탕 금박 글씨가 거대한 권력자처럼 느껴졌다. 태주는 뒷좌석에 놓인 번개탄과 화로를 살폈다.

한가할 때 죽으라던 노인의 목소리가 쟁쟁거렸다. 한가할 때…. 태주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주머니에 든 라이터를 꺼내 엄지를 움직이자 불꽃이 피어났다. 불꽃 따라 태주의 손끝도 떨렸다. 유리창 너머 바닷가 마을에서 하나 둘 불빛이 번쩍였다. 태주는 들고 있던 라이터를 밖으로 던져버리고 어둠이 내린 하얀 길을 천천히 빠져나갔다.



'여우 바당'에서의 일은 금세 잊혔다. 태주는 조 사장을 따라다니며 특수 청소 일을 배웠다. 모든 장비와 임시 숙소로 쓸 컨테이너까지 조 사장이 내주었다. 일을 소개해 주는 수수료도 없었고 돈이 벌리면 장비 값을 갚아나가는 조건이었다. 태주는 나흘째부터 승합차를 타고 혼자서 청소 일을 나가기 시작했다.

"이거, 예전에 내가 팔던 건데 청소할 때 쓰니 좋더라고. 난 이제 별로 쓸 일이 없어."

"예? 소금을 파셨다고요?"

조 사장은 하얀 나일론 부대에 담긴 소금을 가리켰다. 하얀 부대 위로 '신안 천일염'이라 쓰인 검정 글씨가 비닐포대와 함께 색이 바래져 있었다. 조 사장은 창고 안에 놓인 소금을 가져다 쓰라며 목소리만큼 거칠었던 지난날들을 회상했다.

"소금을 만들어서 팔러 다녔지. 신안 소금이 지금이야 유명하지만 예전엔 팔기 힘들어서 차에 싣고 다녔어. 제주에 소금 팔러 들어왔다가 눌러앉은 게 여태 이러고 있네."

"소금이 더 돈 되는 일 아니었나요?"

"모르는 소리 하지 마. 오래전에야 그랬지. 자네도 알 테지만 천일염이 생기고 자염이 사라졌지. 정제염이 나타나면서 천일염도 한동안 안 팔렸네. 이제 다시 천일염이 팔리고 있네만 지금은 옛날식 자염이 좋다고 하니 세상일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거야."

"그런데 소금은 어디에 씁니까?"

"소금은 모든 걸 빨아들여, 청소하러 가보면 바닥에 있는 구질구질한 것들을 제거할 때 소금만 한 게 없어. 바닥에 소금을 쫙 펼치고 나면 예전에 소금밭 일굴 때 생각이나. 그 소금밭 팔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하지 않았을 건데 말이야."

조 사장은 가족도 없이 혼자 지냈다. 태주는 혼자서 일을 한 첫날, 조 사장에게 돼지갈비를 대접했다. 조 사장의 처지를 생각하면 무언가 얽히는 게 아닌지 조심스럽기도 했다.

일을 마치면 태주는 늘 꼼꼼하게 세차를 했다. 세차 뒤엔 그날 입었던 방역복을 비닐에 넣고 꽁꽁 묶어서 버리고 마지막으로 사우나에 들렀다. 컨테이너 숙소로 돌아오면 태주는 문 앞에서 마지막 의식을 치르듯 두 팔을 벌려 온몸을 바람에 말렸다. 옷 속에 배어든 불행한 영혼이 집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게. 낡은 컨테이너 철문을 열 때도 항상 방안 공기를 환기시켰다. 이따금 시큼한 페인트 냄새, 코를 자극하는 새 비닐장판, 낡은 이불에서 풍기는 늙은 개의 털 냄새가 날 때면 그것들 속에 자라고 있을 불행의 씨앗들을 다 날려야 한다고 믿었다. 다시는 불행과 가까워지기 싫었다.



태주는 일주일째 같은 꿈을 꾸었다. 갈대숲 사이로 새들이 노려보고 저수지 위로 경광등 불빛이 어른거렸다. 태주는 바다에서 나온 사람들이 들것에 여인을 실어 구급차로 옮기는 걸 차 안에서 지켜봤다. 들것에 실린 여인의 몸은 물에 젖어 몸매가 드러났고 하얀 옷 위로 검정 해초가 흉측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여인의 팔이 밑으로 툭 쳐지더니 검지 손가락이 태주를 가리켰다. 태주는 화들짝 놀라 차문을 잠갔다. 차 밑바닥에서 길고 축축한 물체가 솟아오르더니 태주의 몸을 옥죄어왔다. 태주는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남은 힘을 모아 팔을 힘껏 들어 올렸다. 오른손 검지 끝이 움찔거리며 번쩍 눈을 떴다.

컨테이너 숙소를 나서며 태주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혼자 지내는 어머니를 찾아갔던 일도 한 달이 넘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폐를 끼치지도 않는 조심스러운 삶을 살아온 어머니였다. 태주는 어머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또 불안해졌다. 그건 어머니 때문이라기보다 아버지의 유산과 같은 것이었다. 어디에 있건, 무슨 일을 하건 태주는 늘 가슴속에 헛헛한 느낌이었다. 밥그릇 크기만 하던 빈자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부터, 더욱 크게 느껴졌고 태주는 가슴에서 늘 바람소리를 들었다.

삽화=정지란 작가



태주는 휘청거리는 몸을 겨우 벽에 기대어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머니는 치매 때문에 나간 게 아니었다. 태주는 여동생의 말들을 떠올렸다. 여동생을 만난 지도 오래됐다고 생각했다.



태주는 오전에 한 군데 청소를 끝내고 어머니를 뵈러 가기로 했다. 헛헛한 기분이 생기면 다른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걸 태주는 잘 알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몸에 남은 악취들을 없애기 위해 늘 가던 부두 근처의 세차장으로 향했다. 세차장은 운전자들을 상대하느라 뒤쪽에 샤워실까지 갖춰 늘 배를 기다리는 화물차 운전자들로 가득했다. 옷을 벗는 동안, 새벽에 느꼈던 헛헛함이 되살아났다. 숨을 몰아쉬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옷장 안에서 전화가 크게 울렸다. 익숙한 번호였다.

"여, 여보세요?"

"오빠, 도대체 어디야? 엄마는 어디 있어? 왜 전화가 안 돼? 엄마한테 치매 증세가 있다고 내가 말했잖아. 혼자 두면 안 된다고!"

여동생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자신감이 넘쳤다. 여동생은 늘 아버지의 보호 아래 태주에게 큰 소리를 쳤다. 그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다르지 않았다. 그나저나 언제 내려온 건지 궁금했다.

"난, 바로 은행으로 갈 거야. 사업을 또 말아먹은 건 아니지?"

여동생의 말에 태주는 속이 뜨끔했다. 태주가 하던 건설업이 크게 잘 된 적은 없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여동생 학비를 내주기에 모자란 적은 없었다. 오래전 일이라 벌써 잊어버린 걸까 생각하다 묻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선풍기 앞에서 몸을 말렸다. 은행 이야기는 뭘까? 집이 팔린 건가? 어머니는 어디로 간 걸까? 온갖 생각이 솟아났다.



집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덜컹거렸다. 바닥에 돌을 박아 넣은 길은 태주의 낡은 승합차 안 물건들을 늘 엉망으로 뒤집어 놓았다. 청소용 빗자루와 양동이, 조 사장이 건네준 천일염 한 부대, 쓰레기를 버리는 나일론 부대, 진공청소기와 훈증 소독기까지,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잡지 못해 차 안을 굴러다녔다.

태주는 어머니 집 대문에 묵직한 자물쇠가 걸린 걸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늘 대문이 열려있던 집이었다. 대문 앞으로 다가가던 태주는 집에 있어야 할 문들이 보이지 않아 자리에 멈췄다. 현관문이며 거실 앞 유리문들이 사라져 고래뱃속을 들여다보듯 집 안이 훤했다. 담장 안 후박나무 아래에 쌓인 문짝과 가구들이 보였다. 집안은 조용했고 어머니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한적한 주택가 모퉁이에 자리한 집에서 어머니는 혼자 지냈다. 뾰족 지붕과 다락이 있는 서양식 집은 군데군데 은회색 칠이 벗겨져 바람이 불 때마다 마당으로 껍질을 떨궈냈다. 태주가 어린 시절을 보내고 결혼하기까지 삼십 년 동안 정이 든 집이었다. 태주는 선뜻 집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망설였다. 겨우 잠재운 불행이 다시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려다 저장된 번호가 없다는 걸 깨닫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문득, 여동생의 말들이 떠올랐다. 어머니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태주의 가슴에선 바람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여러 차례 당부하던 말을 떠올렸다.

"태주야, 내가 조금이라도 이상허믄 날 요양원으로 보내도라. 남들처럼 추하게 늙기 싫으난 나 걱정허지 말곡 꼭 들어줘사 헌다. 가까운데 아니어도 되고 먼 먼 헌디도 좋으난 날 꼭 요양원에 보내도라. 거기 가믄 사람들도 많고 할 일도 이실테주."

"…"

"잊지마랑 꼭 보내도라 알아들엄시냐?"

"어머니 무슨 말을…, 그만 헙써!"

어머니는 드라마에 나오는 치매 노인 때문에 자식들이 고생하는 모습이나 주변에 치매로 정신을 놓친 노인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요양원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여동생이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더라면 태주는 그마저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태주는 담을 넘어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안방, 작은 방과 건넌방, 욕실과 부엌, 어릴 때부터 쭉 지냈던 다락방까지 살폈지만 어머니는 어디에도 없었다.

태주는 경찰서에서 어머니의 행방을 찾고 싶다고 말했다. 젊은 경찰이 태주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빤히 태주를 바라보았다. 태주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조급한 마음에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곧 눈이라도 쏟아질 듯 하늘은 잿빛이었다. 길 건너 회색빛 여인숙 건물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여인숙 앞 언덕을 나이 든 여자가 허리를 구부리고 지나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손에 든 비닐봉지에서 밀감이 굴러 나와 태주의 앞을 지나쳤다. 태주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차림새가 추레해 보였다. 승합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자 전화가 요란스레 울렸다.

"이태주 씨인가요? 여기 경찰서인데요. 실종신고를 하실 겁니까?"

"뭐요? 아까 다 설명드리고 왔잖아요. 경찰이 할 수 있는 건 다 해달라고요!"

"저희도 사실관계를 더 확인해야…"

"아니, 어머니가 사라졌는데 자식이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겁니까?"

태주는 가슴이 더 헛헛해졌다. 도움이 될 거라고 찾아갔던 경찰서였지만 벌써 몇 시간이 지났고 어머니는 그만큼 더 멀어질게 분명했다. 태주는 어딘가에서 홀로 떨고 있을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태주가 독거노인들이 살던 방을 청소하러 들어갔을 때 느끼는 기분을 다른 이들은 조금도 모르는 것처럼. 태주 또한 외로운 생을 살다 가신 분들의 마음이 어땠는지 상상조차 못 한다. 그들의 물건을 바라보면 조금씩 느껴지는 기분이 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마음 약한 이들이었다. 늘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했고 누군가의 관심이 있어야만 용기를 낼 것 같았다. 혼자 있다 떠난 이들은 황망한 마음을 남겨두고 육신만 떠난 듯 보였다.어린아이가 걸음을 배울 때처럼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만 망자의 넋도 다른 공간으로 떠날 수 있는 거라 생각했다.

태주는 바람소리가 한겨울처럼 거세다고 생각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왔다. 손바닥을 펴서 가슴을 세게 두드렸다. 굵은 통나무를 두드리듯 펑펑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집을 떠나 머물 수 있는 곳이 어딜까? 태주가 알지 못하는 친구분이나 이웃집에 가 있는 건 아닐까? 친척 집에 전화해서 알려야 할까? 태주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운전대를 잡은 태주의 손이 덜덜거렸다.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 수만 있어도 이렇게 불안하진 않을 것 같았다. 배가 꼬르륵거렸다. 길가에 있는 만둣집에 들러 김치만두를 꺼내 물며 가게 밖을 살폈다. 주머니에 든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오빠, 혹시 어머니 인증서 비밀번호 알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아, 오빠가 후견인 아니었어? 그 정도는 평소에 준비해 둬야 하는 거 아냐?"

여동생은 금융정보를 조회하겠다고 말했다. 태주는 여동생의 말에도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사실, 아무것도 대답해 줄 게 없었다. 아들이면 모든 걸 준비하고 해결하고 책임져야 하는 건지 가슴속 구멍에서 바람소리가 거세게 들렸다.

티브이에선 제주지역 독거노인 실태를 얘기했다. 작은 여인숙을 쪼개 노인들에게 임대료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뉴스에 태주는 만두를 손에 들고 티브이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원룸 관련법을 개정하기 전에 이뤄진 일들이라 처벌할 근거가 없다고 했다. 뉴스에 나오는 방들은 혼자 겨우 몸을 누일만한 공간이었다. 마치 커다란 관처럼 보였다. 태주는 자신이 청소하러 들어갔던 방들과 비교했다. 조 사장이 알려주던 집들은 항상 허름하고 비좁았다. 겨우 한 사람이 지낼만한 공간에 폐기물 같은 살림도구들이 들어차 있었다. 저승 갈 때 사용할 관에 적응이라도 시키려는 지 작고 작은 공간이었다.

다닥다닥 지붕이 붙은 낮은 골목 사이로 유모차에 매달린 할머니가 지나갔다. 달려가서 어머니 소식을 물으려다 뒤늦게 어머니 사진이 없다는 생각이 났다. 남들이 다 가지고 있는 휴대폰 사진조차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주민 센터에선 이미 달포 전에 다른 사람 이름으로 집 소유자가 바뀌었다고 했다. 직원은 도리어 어머니 소식을 태주에게 물어왔다. 태주는 직원의 얼굴을 뒤로하고 주민센터를 나서며 휴대폰에 메모해 둔 장소들을 살폈다.

전화기가 진동을 했다. "조웅연", 조 사장의 이름이었다.

"일이 들어왔어. 메모해!"

"아, 오늘은 안 되는데…"

"오늘 중으로 꼭 청소해!"

"내일 하면 안 될까요? 아, 아니 당분간 못할 것 같은데요?"

"자네…?"

휴대폰으로 조 사장이 불러준 주소를 검색했다. 전통시장 건너편 여인숙이었다. 여동생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집이 팔렸는데 어머니 계좌에 돈이 없다며 아는 게 있는지 연거푸 물었다.

"근데 계좌는 어떻게 조회했어?"

"난 오빠랑 다르거든. 알 거 없잖아. 근데, 돈이 어디 갔을까? 돈의 행방이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다고 했어."

"단서?"

여동생이 다시 전화를 끊었다. 태주는 여동생의 말이 불쾌했다. 답답한 마음에 두 손을 깍지 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쏟아질 듯 하늘이 기운을 끌어모으며 몸부림치는 듯했다. 차 안에 있는 장비들을 살피고 있을 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

"이태주 씨 맞으시죠? 경찰입니다. 부족한 게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여동생분이 이태주 씨에게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종일 그거 하나 붙잡고 뭐 하는 겁니까? 언제 시작하냐고, 다 때려쳐!"

여인숙은 하천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었다. 태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면 예전에 일을 하느라 지나갔던 곳 일 수도 있었다. 벌써 두 달 가까이, 수 십 차례나 해 온 일이지만 홀로 삶을 마감한 이가 지내던 공간으로 들어가는 건 여전히 불편했다. 좁고 가파른 길이 여인숙으로 이어졌다. 태주는 여러 차례 심호흡을 해보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연거푸 거칠게 호흡을 하며 장갑을 끼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여동생의 전화였다. 전화를 쥐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받을까 말까 망설였다. 훅, 하고 태주의 가슴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솟구쳤다. 여동생은 태주의 기분이나 생각을 헤아리지 않고 평소처럼 바로 말을 꺼냈다.

"혹시 오빠한테도 보냈어?"

"…?"

"엄마가 지난달에 내 계좌로 돈을 보냈는데 이게 집을 판 돈이야? 오빠가 원했던 게 이거야? 혼자 쓰는 게 미안해서 나한테도 보내라고 한 거야?"

"너 무슨 말을 그렇게…?"

"겨우 이 돈이 필요해서 그랬어? 더 필요해? 엄마 찾아오고 내 것도 가져 가!"

여동생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가 집을 팔아 빚을 갚으라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밀감 사업이 망해서 빚 독촉에 시달릴 때였다.

"너네 아방, 너네 공부도 제대로 못 시키곡 해준 게 어서네, 나도 얼마나 미안헌지 모른다. 이제랑 이 집 팔믄 너네 살림에 보탤 거 아니냐. 땅값도 막 뛴댄 허는디…. 너네 반대해도 나 죽기 전이 이 집 팔 거난, 경 알라!"

태주는 휘청거리는 몸을 겨우 벽에 기대어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머니는 치매 때문에 나간 게 아니었다. 태주는 여동생의 말들을 떠올렸다. 여동생을 만난 지도 오래됐다고 생각했다. 문득 가슴이 편안해졌다. 오래도록 괴롭혀 온 헛헛함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언제부턴가 함께 지내 온 불안한 감정, 아버지가 남긴 걸 수도 있었다. 태주의 가슴에 있던 구멍이 한꺼번에 녹아내렸다.



장비를 챙겨 든 태주는 개숫물이 흐르는 도랑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비릿한 내음이 바닷가를 걷는 것 같았다. 건물 벽에 흰색페인트로 쓴 '길손 여인숙' 글씨가 도랑 위에 부서져 내렸다. 네모 난 문들이 빼곡하게 이어진 건물은 얼룩진 소금결정처럼 보였다. 입구는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길에 있었다. 장비를 내려놓고 방역복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작업복과 장비를 정리하는 일은 묘한 긴장감을 주었다. 기다란 고무장갑과 방역용 마스크를 꼈다. 안전모를 쓰고 작업용 플라스틱 보안경을 썼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옷매무새를 살폈다. 옷매무새를 살피는 건 학창 시절, 새로운 학기를 시작하는 일처럼 두렵고 어색한 마음을 달래는 절차였다. 그건 새로 깎은 연필과 지우개의 향을 확인하는 일처럼 막연한 것이지만 태주는 꼭 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막상 일을 시작하면 그런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지만 일을 시작할 때 옷매무새를 살피고 있으면 마음이 숙연해졌다. 태주는 그게 새로운 영혼을 대하는 예의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어제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어색하거나 숙연하거나 하는 기분이 아닌 의무감일까, 또는 다른 무엇이 있었다.

긴 복도로 이어진 여인숙은 빛바래고 손때가 꾀죄죄한 밤색 문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다. 예닐곱 개의 문들이 마주하는 통로로 바람이 지나자 문 하나가 삐걱대며 경계신호를 보냈다. 왼쪽 세 번째 방이었다.

복도 안으로 들어서려다 태주는 심한 악취에 고개를 돌렸다. 주인이 뿌려둔 냄새 제거제와 함께 익숙한 시취(屍臭)가 방역마스크 안을 파고들었다. 태주는 마스크를 고쳐 쓰고 장갑을 단단하게 잡아당겼다. 삐걱대는 문 뒤로 키 큰 노인이 보였다. 흠칫 놀라는 태주와 눈이 마주친 노인은 급히 손에 만 원 지폐 몇 장을 챙겨 들더니 물기를 흘리며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노인은 방문 앞에서 카악, 가래침을 뱉고는 태주를 흘깃거리다 사라졌다. 노인이 사라지자 태주는 방 앞에서 고개 숙여 예를 갖추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지저분하다 못해 시궁창 같았다. 물에 잠긴 이부자리와 벽지까지 타고 올라온 까만곰팡이에 태주는 눈을 찌푸렸다. 방안엔 흔한 티브이도 책상도 없었다. 진작에 같은 건물에 사는 이들이 가져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바닥에 떠 있는 냄비에선 라면이 곰팡이와 함께 들떠있고 군데군데 약봉지며 비닐봉지가 물에 떠다녔다. 방구석엔 물에 불어 두툼한 기저귀 뭉치가 몰려있고 벽을 따라 나이 든 여자가 입었음직한 옷가지들이 기운 없이 늘어서 있었다. 옷차림으로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태주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지지리도 복이 없는 노인이라 생각했다. 작은 창으로는 겨울 햇살마저 들어오기 힘들어 보였다. 창을 열자 녹나무 끝에 중대백로 두 마리가 앉아 태주를 바라보았다. 태주는 얼핏 익숙한 장면이라 생각하다 일을 서둘렀다. 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물부터 빼야 했다. 모든 물건은 남기지 말아야 한다. 망자의 유품은 재활용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돈이 되는 물건들은 이미 조금 전 노인처럼 같이 살던 이들이 가져가는 게 이런 곳의 불문율 같았다. 벽에 걸린 옷가지를 걷어내자 또 다른 옷의 주머니에 곱게 접힌 종이가 보였다. 태주는 가지런히 접힌 종이가 궁금해서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장판을 걷어내고 남은 물기를 빨아내고 조 사장이 준 소금으로 방안을 가득 채웠다. 바닥을 하얗게 덮은 소금이 습기를 빨아들일 때마다 사그락 사그락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태주는 방에서 나와 주머니에 든 종이를 꺼냈다. 종이를 펴자 주름진 만원 지폐 세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뚤게 쓴 글을 읽었다. 종이에 적힌 'ㄱ' 자 끝이 유난히 길었다. 태주는 종이를 얼굴 가까이 끌어당겼다.



제 육신을 거둬 주어서 감사드립니다.

오래도록 추하게 살아온 몸

부디 화장해 주십시오.

봉투는 제 마음입니다.

고맙습니다.



태주는 승합차로 달려가 정신없이 나일론 부대를 뒤졌다. 옷가지들이 들어 있던 부대에서 자주색 꽃무늬 블라우스를 찾아들고 소매 끝 해진 자리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태주는 옷가지를 들고 하늘에다 크게 소리쳤다.

"으아아!"

태주가 내지르는 소리에 녹나무에 앉았던 중대백로 두 마리가 날아올랐다. 오래된 건물 사이로 한 방울씩 눈이 내리더니 금세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골목에서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함박눈이 허공에 잠시 멈춘 듯하더니 일제히 솟구쳐 올랐다. 첫눈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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