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문학의 현장](6)오성찬의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1

[4·3문학의 현장](6)오성찬의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1
무덤의 주인 대신 은빛 억새가 슬픈 노래
  • 입력 : 2008. 02.15(금)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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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의 주인공 주명구가 젊은 사내에게 거리돌림을 하며 뭇매를 맞은 것으로 그려진 성읍민속마을 중심가. 초가 지붕이 수십차례 옷을 갈아입고 거리엔 아스팔트가 깔렸지만 그 날의 아픔은 쉬이 묻어두기 어렵다. /사진=김명선기자mskim@hallailbo.co.kr

남로당도당 거물급 간부 조몽구 모델로 쓴 중편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폭도' 낙인으로 거리돌림
"어디 가봐도 마찬가지… 이만 죄갚음도 약과지"


표선면 성읍민속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무덤들이 열을 지어 있는 성읍공설묘지. 영주산 자락 아래에 들어선 지라 오름 오르듯 묘지를 올랐다. 무덤은 3백여기가 족히 넘을 것 같았다.

성읍공설묘지가 조성되면서 그곳에 1호로 묻혔다는 사람, 조몽구. 그가 잠들어있는 무덤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맨 꼭대기에 다다랐다. 봉긋한 무덤이 눈에 들어와야 할 텐데, 대신 그 자리에 키 큰 억새가 무심히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섰다. 무덤을 파낸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곳에 없었다.

"그의 이름이 다시 기록에 나타난 것은 4년 후의 겨울, 부산에서였다. 남로당 제주지구 거물 주명구 부산에서 체포. 그때의 신문을 뒤져보니까 지방신문은 그 쾌거를 사회면의 머리기사로 대대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공백기의 4년을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두더지 노릇을 했다는 말인가. 의문은 관심을 불렀다. 아, 그는 참 베일 속의 사람이다. 그가 이 사건의 초기에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은 확실하다."('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

조몽구를 모델로 쓴 오성찬씨(68)의 중편소설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 '다시 쓰는 사기(史記) 5'라는 부제에서 짐작하듯, 이 작품은 작가가 4·3을 소재로 쓴 연작 중편중의 하나다. 향토사학자 양충식이 문화재전문위원 자격으로 영주리를 찾아 옛 비석을 일제조사하면서 주명구의 삶과 맞닥뜨리는 이야기다. 소설은 촘촘한 취재를 바탕으로 쓰여졌다. 등장 인물은 실제 작가가 남로당제주도당 거물급 간부였던 조몽구에 얽힌 증언을 채록하는 과정에서 만난 이들이다. 1989년 실천문학사에서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란 이름으로 연작소설집이 나왔지만, 작가가 본래 붙인 제목은 '어느 공산주의자에 관한 보고서'였다.

"인물이었지요. 키는 작달막했으나 남자다웠어요. 원래 지주 집안 출신으로 일본서 학교 다닐 때부터 파업선동에 명수였답니다. 그때부터 요시찰인물이었지요."('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

4·3의 도화선이 된 3·1 사건 당시 제주섬의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은 조직책이었던 주명구. 소설은 그를 평화노선을 지향하는 비둘기파로 금을 긋는다. 무력혁명이 승산이 없다고 봤고, 4·3사건을 일으키는 것을 반대했다. 주명구는 재판을 받고 7년간 옥살이를 한 뒤 영주리로 돌아온다. 꿩을 키우고 사탕수수를 심으며 말년을 보내지만 평탄치 않았다. '폭도'라는 낙인이 따라 다닌다. 소설은 몇몇 마을 사람들이 거리돌림을 하며 주명구에게 가했던 뭇매를 굿의 사설처럼 풀어놓는다.

▲성읍공설묘지 첫 머리에 묻혔던 조몽구의 무덤은 2년전 다른 곳으로 이장됐다. 그 자리엔 억새가 피어났다.

"옵서. 우리 이 마을을 떠낭 살게. 어디 가민 이만이사 못 삽니까? 목젖 부위에 피멍이 들고 광대뼈가 스친 사내는 머리에도 온통 지푸라기투성이였다. 사내가 그 지푸라기투성이의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대답했다. 안되메. 난 이디가 좋은 걸. 곧은 인중의 선, 야무지게 다문 입술, 아직도 사내에게서 그것들은 흩어져 있지 않았다. 어디 가봐도 마찬가지라. 어디 가민 우릴 반길 줄 알고. 허긴 이만 죄갚음도 약과지."('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

팔도에서 모여든 관광객들이 누비는 성읍민속마을의 안길에 주명구의 그림자가 비친다. 힘 좋은 사내가 그를 바닥에 패대기친다. 여자가 울며불며 말려보지만 소용없다. 그래도 그는 떠날 수 없다. '북한엘 가보니까 우리가 애써 만들어놓으려고 했던 공산주의자는 아니데…'라는 주명구의 고백은 그가 왜 굳이 영주리로 돌아왔는지 짐작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주명구는 허연 눈물을 쏟아낸다. 그들이 꿈꾸던 세상은 허공속에 흩어졌고 이데올로기 싸움에 죄없는 사람들만 씻어내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

4·3의 광풍속에 아내와 4남매를 처참하게 잃은 조몽구는 후손이 없다. 영주산 공설묘지 첫 머리에 놓인 그의 무덤은 친척들이 돌봤다. 2006년 9월, 조몽구는 성읍을 떠났다. 성산읍에 가족묘지가 조성되면서 그곳으로 이장됐다. 서귀포시에 사는 조카 조모씨(68)는 "숙부가 원망스러울 때가 많았다"고 했다.

/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오성찬씨와 4·3 문학]'제주의 마을'만들면서 4·3의 심각성 알게됐다

때로 현실은 소설보다 극적이다. 4·3이란 불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 토해낸 이야기는 소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오성찬씨의 소설집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에는 모두 다섯편의 중편이 실렸다. '다시 쓰는 사기'라는 부제 아래 차례로 번호를 매긴 작품이 '나븨로의 환생', '보춘화 한 뿌리', '바람의 늪', '한라구절초',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다. 작가가 이 작품을 쓸 무렵은 '제주의 마을'시리즈를 위해 섬 곳곳을 누비던 때였다.

"1985년이었을 겁니다. 마을 시리즈를 내면서 처음 도두리에 갔는데 그곳 사람들이 맨 먼저 꺼낸 이야기가 4·3이에요. 다음엔 오조리였죠. 그 마을도 4·3으로 상당히 많이 죽은 곳입니다. 그 다음은 함덕리였는데 그곳도 마찬가지였습니다. 4·3을 묵혀둘 순 없겠다 싶었습니다."

1969년 문단에 데뷔한 그가 이때 처음 4·3을 다룬 것은 아니다. 이미 1971년 단편 '하얀 달빛'을 통해 여덟살때 마을 초입에서 목격한 4·3의 기억을 담아낸 적이 있다. 그러다 마을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4·3 문제가 한층 절실하게 다가왔다고 했다. 당시까지도 4·3을 말한다는 것은 금기였다. 마을에서 채록한 온갖 자료를 머리맡에 두고 잠들었는데, 4·3 40주년이 되던 1988년에 이대로 지나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해 4월 '신동아'에 '40년 제주의 한, 4·3 사건의 진상'을 발표했다. 곧이어 피해자들의 증언을 모은 '한라의 통곡소리'를 냈다. 이 자료집은 최초의 4·3증언집으로 통한다. 이들 자료가 나오면서 오씨와 그 가족들은 밤중에 걸려오는 항의 전화에 맘고생을 했다.

'한라의 통곡소리'에 실린 증언들은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를 낳았다. 증언집 말미'잊혀진 이름들'에 실린 5명의 육성은 퍼즐을 짜맞추듯 조몽구의 삶을 복원시킨다. 조몽구를 만나 임종을 지켜봤던 현모씨, 가게안 작은 방을 조몽구에게 빌려줬던 고모씨의 증언 등은 소설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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