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문학의 현장](10)오영호의 '연화촌 사설'

[4·3문학의 현장](10)오영호의 '연화촌 사설'
성담 깡통소리에 질려떨던 어느 밤
  • 입력 : 2008. 03.14(금)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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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제주초등학교 남쪽 옛 집터를 찾은 오영호 시인. 불타버린 집을 뒤로 하고 인근에 성을 쌓아 마을 사람들이 모여살았다. 듬성듬성 남아있는 대나무가 그 시절을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다.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연꽃마을' 연동의 불타버린 집 떠나 성담 쌓아
"밥 먹읍디까" 이상한 인사말 이제야 그뜻 알 듯
북망산천 떠돌 형님 제사상 오를 고사릴 꺾는다


어느 자리에선가 제주의 인사말이 무얼까라는 질문이 나왔다. 흔히 반갑게 인사를 나누면서 "안녕하십니까"라고 하는데, 그것말고 제주다운 말이 있을 것이란 얘기였다. 그날 참석자들이 고개를 끄덕인 인사말은 "밥 먹읍디까?"였다.

"삼촌 밥 먹읍디까?/ 기어, 먹었쪄만// 어쩌다 주린 배를 달래려고 고구마라도 먹고 있을 때 내가 나타나면 어른들 하는 말 '너 참 먹을 복 있다'하며 건네주던 물컹물컹한 고구마 그 맛 잊을 수가 없는데요. 마을길 어디에서나 아는 사람 만나면 '밥 먹읍디까?'하고 건네던 인사말을 뜻도 모르고 했는데요.'('참, 이상한 인사말')

시조시인 오영호씨(63)가 기억하는 4·3의 한쪽은'이상한 인사말'이었다. 전쟁은 곧 가난을 낳는다. 집이 다 불타버려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한끼를 제대로 챙기기가 어려웠을터, "밥 먹읍디까?"라며 안부를 물었을 것이다.

"삼촌, 어디로 감수광?'도 이상한 인사말의 하나였다. "넌, 알 필요어쩌"라는 대답이 돌아오는 그 말속엔 '낮이면 순사가 무섭고 밤이면 폭도가 무섭던 시절'('참, 이상한 인사말')이 비쳐든다. 살기 위해 어디로든 가고, 무엇이든 해야 했던 그 때에 사람들은 마지막 안부처럼 그런 인사말을 던졌다.

1986년 등단한 시인은 지금까지 단 두 권의 시집을 발간했다. 10여년을 사이에 두고 '풀잎만한 이유'(1993)와 '화산도, 오름에 오르다'(2005)를 냈다. 그중 첫 시집에 실린 '연화촌 사설(蓮花村 辭說)'은 유년의 체험을 바탕으로 썼다.

'해질녘 할 일 많지만 일손 놓고 귀가하는/ 곰도 무섭고 범도 무서운 이 시간에/ 공회당 사이렌 소리에 성안으로 드는 사람들.// 남자 어른들은 밤이면 보초막에/ 핏발 선 두 눈만을 부라리며 지켜서서/ 적막을 씹어 삼키며 질려 떠는 가을밤.'('연화촌 사설')

연화촌은 제주시 연동의 옛 이름. 시인은 서사조의 장시조에 그 날의 일을 고스란히 담았다. 연동하면 밤새 불빛이 꺼지지 않는 도심 풍경이 떠오르지만 4·3 당시만 해도 주민의 90%가 농사를 지었다. 시인은 지금의 신제주초등학교 남쪽에 살았다. 집터엔 교회 건물이 들어섰고 머리카락이 빠진 것 같은 시누대만이 겨우 그 시절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4·3으로 집이 불타버리자 연화촌 사람들은 성담을 쌓고 그 안에 모여산다. 시인은 신제주초등학교 사거리 서쪽편에서 옛 신한백화점 건물 부근까지 성담이 빙 둘러졌던 것으로 기억했다. 시조 그대로였다. 침입자를 막기 위해 가시가 돋힌 실거리나무를 심고 깡통을 매달았다. 깡통소리는 앞으로 닥칠 불운을 예고했다. '온 마을 사시나무 떨 듯 떠는 칠흑의 밤을 보릿눌 굴 파고 들어가 두더지가 되었'던 시인. '동무'와 '박순경'이라는 말이 뒤범벅이 되어 들렸던 그날, 눈 앞에서 죽음을 본다.

연화친목회에서 나온 '연동향토사'(1986)에는 연동의 4·3사가 요약되어 있다. 1948년 11월 '계엄령하에서 불순분자로 오인된 7명이 당국에 연행돼 도령모루 동산에서 총살'된 게 최초의 희생이다. 1949년 1월 11일 '중산간 부락에 소개령이 내려진다. 8개 자연부락 1백87호가 전소되고 피난 생활'이 시작된다. 그해 3월 '공비침투 방지를 위한 성담'을 쌓는다. 6·25가 터지고 나서도 폭도들의 출현은 멈추지 않는다. '연동향토사'는 1955년 5월까지 '3명이 출현 곡식 약탈 자행'이라는 기록을 적어놓았다. 시인은 '연동향토사'에 '연화촌 사설'이라는 작품을 실었는데, 이것이 첫 시집에 담긴 동명의 시를 낳는 '밑그림'이 됐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몇 집을 동여 묶어/ 눈보라 몰아치는 검은오름 넘을 때는/ 젖먹이 울부짖는 소리 초목들도 우는데.//얼어죽은 목숨들과 굶어죽는 목숨들이/ 하늘 훨훨 날아올라 눈발로 내려치고/ 쌓인 눈 밟으며 가는 산자들의 발자국'('연화촌 사설')

시인은 4·3으로 큰 형을 잃었다. 제주농업학교에 다니던 형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이유로 죽었는지 모른다. 짐작만 할 뿐이다. 남아있는 가족들은 형의 생일에 맞춰 제사를 지낸다. 시인의 부친은 수재로 통하던 아들의 이른 죽음에 충격을 받아 몇년 뒤 돌아가셨다. 시인은 상생과 화해를 중심에 놓고 억울한 이들을 신원하기 위한 작품을 계속 쓰고 싶다고 했다.

▲콘크리트 건물 숲으로 둘러싸인 제주시 연동의 거리. 4·3때 성담을 쌓아 원처럼 한바퀴 둘렀던 곳이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민간인 1천6백59명 열흘만에 뚝딱 '유죄'

'두 눈에 불을 켠 산 자들이 너를 만나기만 하면 여지없이 허리를 꺾어 버릴거야. 반 백년이 흐른 다랑쉬오름자락엔 오늘도 안개비만 내리고 한 발의 총탄에 4·3의 짐을 지고 북망산천 떠돌고 있는 형님의 제사상에 올릴 살진 고사리를//아내는/ 절 하듯 절 하듯/ 꾸벅꾸벅 꺾고 있다.'('고사리')

4·3에 가신 님 제삿날에 무수히 올랐을 고사리. 때가 되면 돋아나는 고사리에도 그 날의 사연이 있다.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낸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2003)에 따르면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 전역에서 발생한 제주 4·3사건의 인명 피해는 2만5천~3만명으로 추정된다.

이중 4·3사건과 관련해 사법부의 재판을 받고 형을 언도받은 사람은 수천명에 달한다. 일반재판, 미군정 당시 군정재판, 군법회의 등이 4·3 관련 재판이었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군법회의는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두차례 이루어졌다. 1949년에는 민간인 1천6백59명에 대해 모두 유죄판결을 선고한 것으로 나와있다. 사형이 3백45명이고, 무기징역 2백38명이었다. 또한 징역 15년 3백8명, 징역 7년 7백6명 등으로 1948년 군법회의보다 더욱 강경했다.

사형으로 기록된 3백45명중 2백49명은 총살됐다. 구체적인 희생 장소와 날짜는 모른다. 일부 유가족들은 1949년 10월 2일 제주읍 비행장 근처에서 총살당한 뒤 구덩이에 파묻었다는 이야길 소문으로만 들었다. 오영호 시인도 이때에 형이 죽은 것으로 짐작한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1948년, 1949년 제주에서 치러졌다는 군법회의는 법률에서 정한 정상적인 절차를 밟았음을 증명할 수 있는 소송기록, 즉 재판서·공판조서·예심조사서 등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했다. 보고서는 "특히 1949년 군법회의는 열흘이란 단시간 내에, 죄의 유무에 대해 제대로 심리도 하지 않은 채 일률적으로 유죄로 처리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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