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문학의 현장](21)강덕환의 '만벵디'

[4·3문학의 현장](21)강덕환의 '만벵디'
그대 기억하는가, 칠석날 새벽 섯알오름
  • 입력 : 2008. 07.04(금)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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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은 빗방울이 잠시 주춤해진 사이 강덕환 시인이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에 조성된 만벵디 묘역을 찾았다. 1950년 섯알오름에 희생된 예비검속자 유족들이 5년여만에 눈물로 시신을 수습해 안장한 곳이다.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50년 섯알오름서 한림 일대 예비검속자 희생
5년뒤 문드러진 시신 거둬 만벵디에 매장
기다림에 지쳐 흙으로 돌아간 살과 뼈의 사연


장맛비가 오락가락했다. 세숫대야로 물을 쏟아붓는 것처럼 떨어져 내리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엔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큼직한 돌에 새겨진 '갯거리오름'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오름 표지석이 있는 시멘트길을 따라 차를 몰았다. 초록의 무덤이 눈에 안겼다. 저 멀리 금악오름이 한라산처럼 버티어선 그곳에 예순 한명의 영혼이 잠들어있다. 한림읍 금악리 만벵디 묘역이다.

'그대, 기억하는가 섯알오름/ 듣도 보도 못한 골짜기/ 모진 광풍에 스러지던/ 칠석날 새벽// 부모형제 임종 지키지 못한 불효/ 천년을 가도 지워지지 않는다는데/ 뼈마디 하나 겨우 추스른/ 주름진 세월'('만벵디')

아비가 죽고, 삼촌이 죽고, 남편이 죽었다. 아이를 가르치던 형님, 농사짓던 동생도 죽었다. 한국전쟁이 터지던 해 , 그들은 하나둘 끌려갔고 수년뒤 허연 유골로 나타났다. 강덕환(48)시인의 '만벵디'엔 그 사연이 있다.

4·3이 발발한 1948년과 그 이듬해 엄청난 희생을 겪은 제주섬 사람들에게 한국전쟁은 4·3보다 평화로운 시절이었다.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전쟁의 포탄을 비껴서는 듯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예비검속이 섬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비검속은 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미리 구금하는 것을 말한다. 한림읍 일대에 살던 사람들중에도 한국전쟁 직후 예비검속 대상자가 있었다. 이유는 잘 모른다. 누군가 앙심을 품고 무고하거나, 가족이나 친족중에 무장대로 활동한 사람이 있거나, 한림에 주둔하던 경찰이나 서청의 미움을 사서 그랬을 거라 짐작할 뿐이다.

이들이 끌려가 희생된 곳은 대정읍 섯알오름. 1950년 음력 7월 7일이었다. 만벵디 묘역의 빗돌에 촘촘에 새겨진 것처럼, 순박한 농민이나 교사, 여자까지 희생됐지만 시신을 바로 거두지 못했다. 유족들의 통곡에도 학살터 출입이 통제됐다.

'기다림에 지쳐/ 살과 뼈는 흙으로 돌아가고/ 체온은 햇볕에 보태어/ 야만의 땅엔/ 날줄과 씨줄로 곱게 엮은/ 저토록 고운 벌판인데'('만벵디')

그 죽음을 확인하는 데 5년 7개월이 걸렸다. '가족이 저 곳에 있다'는 말을 꺼내면 그 역시 불온한 자로 몰리던 때였다. 유족들은 숨을 죽이며 섯알오름으로 향했다. 이미 시신은 썩어 문드러졌고 허연 뼈를 드러낸 상태였다. 윗니가 아랫니로 들어간 치아를 보고 혈육을 확인하는가하면 머리모양, 썩지않은 옷가지, 명함과 같은 소지품으로 가까스로 누구인지 구별지었다. 죽어서도 구천에 못오른 원혼들은 그제서야 만벵디에서 눈을 감았다.

▲만벵디묘역에 세워진 위령비. 우뚝 솟은 빗돌 한켠에 강덕환 시인의 '만벵디'가 촘촘히 새겨져있다.

1994년부터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 4·3피해신고실에 근무하면서 시인은 숱한 증언을 듣는다. 그들의 증언은 송두리째 시였다. 그보다 더 큰 감동이 있을까. 첫 시집 '생말타기'(1992)에 실린 몇편의 시가 4·3을 에둘러갔다면 그 이후 쓰여진 작품들은 '현장에서 게워낸' 것들이었다. 뜻이 맞는 시인들과 공동시집을 묶어낼 생각이라며 작가가 뽑아 건네준 20여편의 시가 그랬다. 북촌, 선흘, 표선백사장, 빌레못굴, 함덕백사장, 교래, 동광, 가시리, 오라동, 선흘리 등에서 만난 4월이 있다. 2001년 만벵디 유족회 위령비 건립 즈음에 썼던 '만벵디'도 그중 하나다.

'식구들 둘러앉아 먹던 밥숟가락/ 채 놓기도 전에 끌려간 부모형제들은/ 호적도 지우지 못했습니다//보도 듣도 못한 형무소에서/ 들이쳐 분 바당에서/ 한라산 어느 골짜기에서/ 총 맞고 매 맞아 흙 구덩이에 처박히고/ 북 먹어 고기밥이 되고/ 얼고 배고파 까마귀밥이 되어'('이제랑 오십서')

이 시가 옛 주정공장에서만 부를 수 있는 노래일까. 시인은 대학 2학년때 명월리에서 만났던 촌로를 잊지 못한다. 그는 누가 볼까 두려워 달력 뒷쪽에 4·3을 읊은 한시를 지어 적어놓았다. 그의 이름도, 생사도 확인할 길이 없지만 당시 어렴풋이 시인에게 다가왔던 4·3은 만벵디의 사연을 들으며 안개가 걷혔다.

예비검속은 정당했을까

일제때 생겨나고 미군정때 폐지…돌연 부활 경찰서 4곳 관할 검속


강덕환 시인은 '예비검속은 정당했나'란 물음표를 던진다. 일제식민지 시절, 조선인에 대한 통제수단으로 만들어진 예비검속법은 미군정청에서 폐지된다. 한국전쟁 기간에 이 법이 어떻게 부활했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기는 이유다.

경찰서가 있던 제주읍, 서귀포, 모슬포, 성산포에서 일제히 예비검속이 이루어졌다. 검속자는 A급(애매한 자), B급(경한 자), C급(중요한 자), D급(가장 중요한 자)으로 등급을 나눴다. 그 기준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예비검속자들이 희생된 곳은 섯알오름 탄약고터를 제외하면 확실치 않다. 정뜨르비행장에서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제주앞바다, 서귀포앞바다에 수장되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섯알오름에선 모슬포경찰서에서 끌려온 사람들과 한림지역에서 이송되어온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만벵디처럼 1956년에 수습된 1백32구의 유해는 대정읍 상모리 '백조일손지지' 공동묘역에 안장됐다.

서귀포경찰서 관할 예비검속자 유족들은 이보다 더 딱했다. 희생된 날도, 장소도 몰라 유해를 수습할 길이 없었다. 유족들은 예비검속 당시 구금되었던 절간창고에서 트럭에 실려나간 날을 기준삼아 2001년 첫 위령제를 지냈다. 이듬해부터는 서귀포시 하원동에 부지를 마련해 위령제를 봉행하고 있다.

만벵디유족회는 1999년 결성돼 2001년 첫 위령제를 올렸다. 만벵디 묘역을 찾아간 날은 풀들이 파르라니 깎여 있었지만 유족들은 걱정이 많다. 후손이 없는 봉분이 여럿이기 때문이다. 동행한 강덕환 시인은 "직계가족이 아니면 제때 벌초를 하기 어렵지 않느냐"면서 "행여 방치된 묘가 생겨날까 싶어 몇몇 유족들은 합장해서 공원을 조성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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